1.
닛포리에 있는 와사비 게스트 하우스에서 눈을 뜬 두 번 째 날이다.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5시 반이었다. 며칠 째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 예전에 유럽여행 했을 때는 잘 잤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통 잠을 못 잔다. 등상 후유증으로 몸이 아픈 것도 있지만, 작은 소리에도 바로 깨버려서 계속 피곤함이 쌓인다. 아무래도 다음 여행부터는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못 잘 것 같다.

씻고 나와서 정리를 하고, 숙소를 옮길 채비를 하고 있는데 한 일본인이 말을 걸었다. 게스트하우스 조식 신청을 했냐고 물어서 아니라고 했더니 자신의 조식권을 주었다. 게스트 하우스의 조식권은 전 날에 사면 300엔이고 당일 구매하면 500엔이다. 편의점에만 가도 400~500엔은 쉽게 넘기기 때문에 300엔이면 상당히 괜찮은 가격이지만, 나는 아침을 잘 먹지 않기 때문에 신청하지 않았었다.
물론 공짜로 준다면 먹는다. 특히 오늘처럼 원치 않게 일찍 일어나서 시간이 많은 날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와이파이를 마음껏 사용하며 조식을 즐기게 되는 건 행운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돈을 주고 산 조식권을 나에게 주다니... 일단은 거절했다. 그랬더니 자신은 더 잘 생각인데, 나는 일찍 가는 것 같으니까 먹고 가라고 했다. 친절도 하셔라. 예의상 두어번 더 거절하고 감사하게 받았다^_^
그 뒤로 이야기를 좀 나누었는데 이 분은 도쿄의 가나자와에 살고 있는데 게스트 하우스 운영에 관심이 있어서 여기 저기 숙박을 하고 있는 중이셨다.

기껏해야 300엔 짜리 조식이니까 '빵과 토스트, 잘 나오면 스프가 있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상당히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토스트와 잼, 잘 지어진 밥과 카레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밥과 카레 쪽이다. 카레 냄비의 뚜껑을 열었더니 무려 가지 버섯 카레다! 야채 카레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나는 감격을 하며 접시에 담았다. 옆에 카레 보울이 있던 것을 못 보고 접시에 담아버려서 묽은 카레가 접시 한 가득 찬 것은 실수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거기에다 옆에는 요거트와 오트밀까지 있었다. 와... 카레와 요거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두 가지인데 어떻게 알고...(〃ω〃)

조식 시작 시간인 6시 반에 딱 맞춰 먹은 거라 사람도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밥먹기 최적의 조용한 환경까지 갖춰져서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다. 조식권을 주신 가나자와 출신의 30세 일본인 남성분 감사합니다.

2.
야마노테센을 타고 닛포리에서 신주쿠로 갔다. 이번 숙소는 쿠야쿠쇼마에 캡슐 호텔이다. 프론트에 짐을 맡기고 근처 카페를 검색했다. 처리할 일들이 몇 가지 있어서 오전을 카페에서 보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도쿄 여행을 하며 둘러본 카페를 분류해보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크게는 개인 카페와 체인점으로 나뉜다. 한국 같았으면 분위기 좋은 아무 카페나 갔겠지만, 일본은 충전(充電, チャージ )을 하면 안 되는 카페도 많고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없는 곳도 많기 때문에 아무데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체인점 카페를 가기로 하고 주변을 검색해봤다.

첫째, 스타바(スタバ, 스타벅스)는 충전도 되고 와이파이도 되지만 너무 사람이 많아서 탈락.
둘째,  도토루(ドトール)는 3층까지 있어서 좋아보였지만 와이파이도 안되고 충전도 할 수 없었다.
셋째, 산마루쿠 (サンマルク)는 초코 크루아상으로 유명한 곳인데 아침을 잘 먹어서 그건 별 관심이 없었다. 와이파이는 되었으나 충전이 불가능했다.
마지막이 타리즈(tully's coffee, タリーズ)였다. 여기도 안 되면 맥도날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도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 그를 위한 좌석도 있었다.

3. 타리즈에서 열심히 할 일을 처리하고 나니 1시였다. 배가 고파져서 점심으로 뭘 먹을까 생각하다가, 아침에 먹은 카레가 너무 맛있었어서 점심도 카레를 먹고 싶었다. 그래서 마침 인터넷도 되겠다 주변을 검색해봤더니 "curry up"이라는 가게가 나왔다. 사실 내가 정말 먹고 싶었던 카레는 카가와 테루유키가 어느 방송에서 추천했던 blake라는 카레 가게였지만, 일요일에는 영업을 안해서 포기했다.
Curry up은 내가 있는 신주쿠 산초메에서 신주쿠코엔(신주쿠공원)을 지나 센다가야 쪽으로 가야했다.
신주쿠코엔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언어의 정원>의 배경이다.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봤던 터라 꼭 들르고 싶었지만, 1시가 넘은 한낮에 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비가 오는 여름의 아침 7시나 8시 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초콜렛을 들고 찾아야 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 핑계를 댔지만 사실 배가 고파서 지나쳤다.
 
4.
Curry up은 센다가야에서 하라주쿠로 가는 길에 있었다. 메이지 신궁 부근이기도 하다. 이 근처는 편집숍도 많고 고가의 맨션이나 단독 주택이 많다. 언뜻 보기에도 부유해보이는 동네다. 일본에서, 그것도 도쿄에서 부유한 사람들이면 얼마나 부자일까, 땅 값은 얼마고 집세는 얼마일까, 자가일까 전세일까, 차는 아우디일까 BMW일까 벤츠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외국차? 이런 생각을 하다가 도저히 얼마일지 계산이 안 되길래 멈췄다.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의 어느 단편에서 '계산'을 언급했던 게 떠올랐다. 내 인생에 계산들은 1시간 7800원의 근로장학생 아르바이트 시급, 1학기 350만 원의 대학 등록금, 교환학생 1년을 위한 1000만 원, 코어사업 장학금으로 매달 지급되는 50만원, 한국에 돌아가서 구해야 할 원룸 보증금 500만원과 월세 50만원 등등. 수 많은 '계산'들이 머리 속을 지나갔다.

그러다 도착한 curry up. 900엔의 카레. 먹자. 먹고 살기 위한 계산이니까 일단은 먹자.

작은 가게였다. 서촌이나 성북동에 있을 법한 외국식의 작은 식당이다. 2시가 넘었는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주방에는 일본인 한 명과 인도나 그 쪽에서 왔을 것 같은 외국인이 카레를 만들고 있었다. 인도 카레 전문점이니까 인도인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주문은 やさいカレー&バタチキンカレー(야채카레와 버터치킨카레) 반반 S사이즈로 했다.
맛은 내가 아는 그 인도식 카레다. 확실히 루카레인 일본식 카레보다는 깔끔한 느낌이고 향신료가 강하다. 나의 학교 근처에 있는 유명한 인도식 카레 식당 베나레스, 오샬, 비나 셋 중에서는 비나에 가까운 인도 카레 맛이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와서 아침엔 일본식 카레, 점심은 인도 카레, 그러면 저녁은 편의점 레토르트 카레로 할까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하라주쿠로 걸었다.

5.
하라주쿠는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유명한 크레페 집들이 많은데, 크레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칼로리도 높아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쇼핑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아사쿠사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통과했다.

6.
일찍 숙소에 들어와서 누웠다. 캡슐 호텔은 생각보다 훠어얼씬 편안했다. 무엇보다 깔끔하고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어서 좋았다. 그리고 텔레비전도 볼 수 있었다!!

츠마부키 사토시를 본방송으로 보게 되다니!!!

오늘도 이렇게 가는 구나....

1.
진보초를 나와서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덕후들의 성지라는 아키하바라! 만화는 많이 보는 편이지만 아키하바라에 있을 법한 애니메를 보지는 않아서 '이거를 반드시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전자제품에도 그닥 관심이 없어서... 아키하바라에서 내가 둘러볼 곳은 돈키호테정도 였다. 돈키호테라면 일본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닌가 하겠지만, 아키하바라의 돈키호테는 조금 다르다. 다른 매장보다 코스프레 옷이 훨씬 더 많다...ㅋㅋㅋㅋ 그리고 8층에는 아키하바라의 딸들 AKB48극장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 AKB48은 조금 허접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는 대형 가수다. 한국 아이돌들이 워낙 몇 년씩 준비를 하고 나오기도 하고, 손에 닿을 수 없지만 친근한 '스타'를 컨셉으로 한다. 반면, AKB48은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컨셉으로 돈키호테의 아키하바라 점 8층에 위치한 전용 극장인 AKB48 극장에서 상시 라이브 공연을 열고 있다. AKB자체가 '아키하바라'의 약자다. 자매 그룹으로 일본내에 SKE48, NMB48, HKT48, NGT48이 있다. 다 난바, 하카타 같은 일본의 유명 거리의 약자다. 해외에도 있다고 하니 규모가 엄청나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SOL48해서 서울에도 생길지 모른다.

이곳이 바로 AKB48극장이다. 삼촌팬들만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심지어 당일 티켓 예매는 불가능하다. 온 김에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예전에 나도 아이돌 보러 방송국 가고 그랬었는데... 너무 멀긴 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더 넓으니까 더 보러 가기 힘들겠지? 그래서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이나 키우는 아이돌 컨셉이 잘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2.
아키하바라를 나와서 아사쿠사로 향했다. 이 때부터 걷는 게 엄청나게 힘들어졌다. 중간중간 공예점이나 예쁜 가게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오후 2시라서 햇빛도 뜨겁고 점점 지쳐갔다. 아사쿠사에 가서 닌교야끼를 먹을 생각으로 겨우겨우 버텼다.

그렇게 도착한 아사쿠사가...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전쟁터에 가까웠다. 그 동안 관광객이 많은 곳을 갈 일이 없었던 터라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온 것이 낯설었다. 여행 중이 아니라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 것을 꺼려하는데 저길 뚫고 지나가야 한다니. 굳게 결심하고 어쨌든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돌아 나왔다. 인파에 치여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나의 닌교야끼.... 흑.... 닌교야끼를 생각하며 버텼는데ㅠㅠ

3.
그렇게 실망감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이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여기서 멀지 않고 숙소에 가는 길이기도 한 우에노 공원으로 결정했다. 공원이면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도 팔거고 그걸 먹으면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 길에 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는 없지만,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자주 나오는 집에 조상을 모시는 그 나무 장 같은 것을 파는 거리가 있었다. 그 나무 장 같은 것은 '부츠단(仏壇)'이라고 하는데 조상의 영정을 걸어두고 향을 피우고 공양을 한다.
사실 지나가면서 본 나무 장이 부츠단인지 카미다나(神棚)인지 몰랐었다. 그래서 숙소에 와서 찾아보니, 내가 본 것은 조상을 모시는 부츠단이고 카미다나는 국가신을 모시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종교가 혼교주의라는 것 정도만 아는데, 이전에 크리스마스에 후쿠오카에 갔을 때 아무도 성탄절을 기리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일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종교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4.
우에노 공원에 도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JR 우에노 공원 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귀여운 빵을 팔고 있길래 본래의 목적이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까맣게 잊고 들어갔다.

우에노 공원의 핵심인 우에노 동물원을 컨셉으로 하는 빵이다. 이 베이커리 옆에 바로 붙어서 롯데리아도 있었는데 롯데리아에서도 우에노 한정으로 코알라 시리얼이 올라가는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배는 고프지만 곧 저녁 시간이라 빵 하나를 다 먹기는 부담스러웠고, 아까 가구라자카에서 페코짱야끼를 못 먹은 것과 아사쿠사에서 닌교야끼를 먹지 못한 서러움이 겹쳐서 결국 판다 야끼를 하나 샀다. 맛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커스타드 맛!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맛 없다.
빵은 따뜻한데도 퍽퍽했고, 커스타드는 한 군데 뭉쳐 있어서 질감이 무슨 팥앙금 같았다. 이건 뭐... 학교에서 집에 가는 삼각지역에서 산 델리만쥬를 다음 날 등교할 때 먹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맛이 없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누가 그런 건가. 왜 난 먹고자 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잊었던 건가....

5.
판다야끼에 실망한만큼 저녁을 잘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5시가 다 되어가고, 몸도 힘들어서 저녁은 최대한 숙소 가까운 곳에서 해결하고 바로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숙소 가까운 곳에서 아무데나 들어가기로 했다. 말이 '아무데나'이지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음식점을 고르는데 기준이 까다로워졌다.

첫째, 생맥주(生ビル, 나마비루)를 팔 것. 둘째, 오늘 고생했으니까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칼로리가 높은 음식. 셋째, 인터넷에서 추천하는 곳을 찾지 말고 내 눈으로 판별할 것.

배가 고파 죽겠는데 조건이 너무 많다. 이 조건을 다 생각해봤을 때 맞는 건 역시 라멘에 교자다. 아니면 야끼도리 정도.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라멘집과 야끼도리집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가게들을 지나치고 한참을 헤메이다가(숙소 주변에서만 거의 40분 정도) 결국 뭔가 심상치 않아보이는 라멘집이 보였다. 겉에는 뭔가 오래되어보이는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그 사진들을 자세히 보니까 옛날에 방송에 나온 적도 있나보다. 너무 허름해서 망설여졌지만, 빨간 국물에 매혹되어 들어갔다.
탄탄츠케멘을 파는 가게였다. 츠케멘은 면과 국물이 따로 나와서 면을 진한 국물에 찍어먹는 음식이다. 이 가게는 탄탄츠케멘 전문점으로 매운 탄탄멘 국물에 면을 찍어먹게 나온다.

가게 내부도 허름하다. 그래도 라멘야 답게 자판기로 계산한다. 그런데 자판기에 동전 넣는 곳을 막아놨다. 응? 난 동전 밖에 없는데?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그래서 결국 주인에게 죄송한데 동전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괜찮다고 동전으로 달라고 하셨다ㅋㅋㅋㅋ뭐지... 이럴거면 왜 자판기가 있는걸까?
여튼 그렇게 가장 작은 소 사이즈로 주문하고 계산을 했더니 주인이 辛さ(카라사, 맵기)를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봤다. 그제서야 맵기 단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고민을 하다가 제일 매운 단계인 極辛를 선택하자, 주인이 옆에서 뭐라뭐라고 말을 했다. 내가 못 알아듣고 ㅇㅅㅇ? 하는 표정으로 있으니까, 다시 친절하게 천천히 말하셨다(뜬금없지만 주인은 정말 만화에 나오는 라멘야 주인처럼 생겼다). 그런데도 못 알아들었다. 되려 주인이 곤란해보여서 "私、日本語が下手ですから、ちょっとゆっくり…(저 일본어를 잘 못해서요, 좀 천천히...)"라고 했더니 엄청나게 미안해하면서 "辛いことがとくいですか(매운거 잘 먹어요)?"라고 물어보셨다. 그제야 알아듣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알았다며 주방으로 가셨다. 주방에서 주방장과 둘이서 나에 대해 뭐라뭐라 말 하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어차피 들어도 못 알아들었을 거다. 조금 기다리니까 음식이 나왔다.

앗, 이런 아부랏뽀이 (油っぽい、기름진)한 비주얼의 국물이라니... 난 매운게 먹고 싶었는데, 이건 매워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기름기가 더 무서웠다. 나는 라멘도 기름때문에 돈코츠라멘보다는 미소나 시오를 좋아하는데... 그래도 내 인생 첫 츠케멘이니까 일단 먹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기름 져도 맛있어~!!@@ 이렇게나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고기 육수 국물 안에는 아지타마고(간이 된 일본식 삶은 계란)와 돼지 고기, 마늘, 파, 숙주가 들어가 있었는데 이 국물 맛이 장난이 아니다. 국물을 먼저 한 입 먹고 감동한 뒤에 면을 담가서 먹었는데 진짜 잘 어울렸다. 면의 두께가 일반 라멘보다는 더 두꺼운데 칼국수 면 같으면서도 얇지는 않고 쫀득쫀득했다.
워낙 매운걸 좋아해서 그런지 그렇게 맵지는 않았다. 이 정도가 "극 매운맛"이라니 좀 아쉬웠다. 앞으로 일본 생활하려면 이정도 매운맛에 만족해야하는 건가... 그래도 지금 맛있으니까 됐다.
잘 먹고 일어나서 주인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니,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かわいです!(귀여우세요)"라고 했다.
어허허헣? 허허허허허? 기분이 좋아지네? 룰루 댁도 귀여우세요 (*´ω`*)

6.
밥도 잘 먹었고, 귀엽다는 소리도 듣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이 기분이 너무 좋으면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된다. 숙소 앞 이온몰(슈퍼)에 들러서 과자와 맥주를 샀다. 과자는 내가 지금 행복하니까 "幸せバタ味(행복버터맛)"감자 칩, 그리고 산토리 가을 맥주!

그렇게 하루를 또 마무리한다.

어제 등산 한 것도 모자라서 오늘도 무리해서 걸었다. 휴대폰 걸음 체크 기능을 보니 4만 보를 넘게 걸었더라... 최고 기록 경신이다. 내일 아침 일어날 때 다리 아플 게 겁난다.
1.
또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났다. 어제 12시가 다 되어서 잤지만 등산의 후유증인가... 온 몸이 쑤셔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내 몸에 이런 근육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은 근육들마저 아팠다.
오늘도 계속 걸어야 하는데 몸 상태를 봐서는 무리일 것 같았다. 그래서 계획을 변경하고 일찍 일어난 김에 츠키지 시장에 갈까 했지만, 정성들여 만든 일정표이기고 하고 바꾸는 게 더 귀찮아서 그냥 예정대로 가기로 했다.

숙소 바로 앞에 역이 있기 때문에 편하게 지하철로도 갈 수 있지만, JR은 신물이 날 정도로 타기 때문에 버스로 가는 여정을 택했다.

2.
그렇게 버스를 타고 도착한 첫 번째 목적지는 와세다 대학 (早稲田大学)이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8시 조금 전이었는데, 신기하게 학교 정문이 닫혀 있었다. 8시 정각이 되자 종이 울리면서 문을 열었다. 마침 입학시험이 있는 날이었어서 일찍 도착한 수험생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도 학생인 척 들어갔다.

와세다 대학교를 일정에 넣은 이유는 내가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게 된 계기라고 까지 말 할 수 있는(지금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연극과를 졸업했고, 가장 좋아하는 일본 배우인 사카이 마사토가 와세다 대학 중어중문학과 중퇴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와세다 출신이라는 것 만으로도 찾아올 가치는 충분했다.
와세다 대학의 앞은 우리 학교 앞과 마찬가지로 서브웨이도 있고 맥도날드도 있었다. 다른 점은 커리 가게가 정말 많았다. 와세다 대학 학생들은 커리를 좋아하나 보다...

3.
와세다 대학을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가구라자카까지 걸을 예정이었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으로 맥주와 오징어 안주를 먹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다. 무엇보다도 커피가 먹고 싶었다. 가구라자카에 거의 다 와갈 때쯤 210엔에 아이스 커피를 파는 카페가 보여서 들어갔다.

카페 벨로체인데 오늘 하루 종일 걸으면서 네 번은 본 것 같다. 한국의 이디야 수준이다. 저렴하고 보편적이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린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구라자카에 도착했다. '자카'라는 것 자체가 일본어로 坂(사카, 언덕)라는 말이기 때문에 경사가 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부터 내려간 거라 힘들지는 않았다. 가구라자카는 옛 일본의 유흥가? 같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외국 음식점들이 자리 잡았다. 내가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한데, 아라시의 니노미야가 출연한 <삼가아뢰옵니다, 아버님>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전통 일식집이라든지, 예전에 게이샤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생활을 알 수 있다. 

여기가 바로 드라마 속에서 니노미야가 상경한 칸쟈니의 요코하마를 기다리던 곳...!
뭔가 두근두근 했다.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심경이 이해가 갔다. 안에 들어가니 아라시 팬들이 다녀 간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쉽게 찾았던 '링고 계단'. 드라마 속에서 여주인공이 사과 바구니를 놓쳐서 사과들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잇페이 (니노미야)가 주워주며 첫눈에 반한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예쁜 계단이다.

가구라자카는 좁은 골목과 돌 바닥으로도 유명하지만, 간식 거리도 많다. 점심을 먹기 위해 먹지는 않았지만, 지나가면서 슈크림으로 유명한 베이커리 COMPAIN과 일본 유일의 페코짱야끼를 파는 FUJIYA도 볼 수 있었다.

4.
가구라자카를 지나 진보초까지 걸었다.

일본어 활자를 읽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서점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도쿄에 오면 꼭 진보초 고서점 거리를 와보고 싶었는데, 읽을 줄을 모르니 그림의 떡이었다. 결국 책의 거리인 진보초는 나에게 점심을 먹는 곳이 되어버렸다.
아쉽기는 하지만 나의 무지함을 탓할 수 밖에.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음식이 저렴하다. 그래서 대학가나 도서관 근처는 먹을 게 많다. 지식으로 배를 채워서 인가... 그보다는 공부하면 돈을 벌지 못해서 그런 거 같다ㅎㅎㅎ

진보초하면 '사보루'와 카레 거리가 유명하지만, 내가 점심 먹을 곳으로 택한 곳은 하루키의 단골집이었던 덴푸라이모야(天ぷらいもや)다.

진보초는 애초에 주변에 대학가가 있기 때문에 형성된 책의 거리다. 그래서 대학생이었던 하루키도 이 곳에 자주 왔다. 그리고 그가 즐겨 먹었다는 700엔 짜리 덴푸라 정식을 파는 '덴푸라 이모야'.
자세한 설명은 http://naver.me/FxizcWF0 여기에 나와 있다.

내가 찾아 간 시간은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다. 손님은 4팀 정도로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메뉴는 덴푸라 정식과 에비 정식 두 가지다. 주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튀기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차와 된장국, 밥을 준비해준다.
이 된장국과 밥이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된장국에는 대첩인가 제첩인가... 여튼 작은 조개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밥은 찰기가 이제껏 먹어본 것과 달랐다. 밥과 국이 너무 맛있어서 덴푸라가 맛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덴푸라마저 감탄을 하게 했다. 튀기자마자 그릇에 올려줘서 기름이 남아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평소에 먹던 누런 튀김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번만 튀긴 데에다가 오래 기름에 담근 것도 아니어서 뽀얀 흰 색에 가까운 빛깔에 반죽은 두껍지 않고 눈꽃처럼 피어 있었다. 덴푸라 정식의 구성은 가지, 고구마, 가자미 (혹은 전갱이... 여튼 납작한 생선), 오징어, 새우가 각각 1개 씩이다. 가장 맛있었던 것은 전갱이인지 가자미인지 모르는 튀김이다.

그렇게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그래도 진보초에 왔는데 서점 한 군데 정도는 들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눈 앞에 있는 서점을 들어갔다.
앗, 그런데 안이 심상치가 않았다. 양쪽에는 고양이 사진과 일러스트가 붙어 있었고, 진열대에 있는 책들은 모두 고양이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고양이 관련한 서적만 취급하는 '고양이 전문 서점'이었던 것이다.
밖에서 보기에는 궁서체 한자로 간판이 되어 있어서 전혀 몰랐다. 
재미나게 구경을 하고 엽서를 구매하며 주인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허락해 주셨다.

아무튼 진보초는 재미난 곳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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