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보초를 나와서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덕후들의 성지라는 아키하바라! 만화는 많이 보는 편이지만 아키하바라에 있을 법한 애니메를 보지는 않아서 '이거를 반드시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전자제품에도 그닥 관심이 없어서... 아키하바라에서 내가 둘러볼 곳은 돈키호테정도 였다. 돈키호테라면 일본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닌가 하겠지만, 아키하바라의 돈키호테는 조금 다르다. 다른 매장보다 코스프레 옷이 훨씬 더 많다...ㅋㅋㅋㅋ 그리고 8층에는 아키하바라의 딸들 AKB48극장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 AKB48은 조금 허접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는 대형 가수다. 한국 아이돌들이 워낙 몇 년씩 준비를 하고 나오기도 하고, 손에 닿을 수 없지만 친근한 '스타'를 컨셉으로 한다. 반면, AKB48은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컨셉으로 돈키호테의 아키하바라 점 8층에 위치한 전용 극장인 AKB48 극장에서 상시 라이브 공연을 열고 있다. AKB자체가 '아키하바라'의 약자다. 자매 그룹으로 일본내에 SKE48, NMB48, HKT48, NGT48이 있다. 다 난바, 하카타 같은 일본의 유명 거리의 약자다. 해외에도 있다고 하니 규모가 엄청나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SOL48해서 서울에도 생길지 모른다.

이곳이 바로 AKB48극장이다. 삼촌팬들만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심지어 당일 티켓 예매는 불가능하다. 온 김에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예전에 나도 아이돌 보러 방송국 가고 그랬었는데... 너무 멀긴 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더 넓으니까 더 보러 가기 힘들겠지? 그래서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이나 키우는 아이돌 컨셉이 잘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2.
아키하바라를 나와서 아사쿠사로 향했다. 이 때부터 걷는 게 엄청나게 힘들어졌다. 중간중간 공예점이나 예쁜 가게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오후 2시라서 햇빛도 뜨겁고 점점 지쳐갔다. 아사쿠사에 가서 닌교야끼를 먹을 생각으로 겨우겨우 버텼다.

그렇게 도착한 아사쿠사가...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전쟁터에 가까웠다. 그 동안 관광객이 많은 곳을 갈 일이 없었던 터라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온 것이 낯설었다. 여행 중이 아니라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 것을 꺼려하는데 저길 뚫고 지나가야 한다니. 굳게 결심하고 어쨌든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돌아 나왔다. 인파에 치여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나의 닌교야끼.... 흑.... 닌교야끼를 생각하며 버텼는데ㅠㅠ

3.
그렇게 실망감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이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여기서 멀지 않고 숙소에 가는 길이기도 한 우에노 공원으로 결정했다. 공원이면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도 팔거고 그걸 먹으면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 길에 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는 없지만,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자주 나오는 집에 조상을 모시는 그 나무 장 같은 것을 파는 거리가 있었다. 그 나무 장 같은 것은 '부츠단(仏壇)'이라고 하는데 조상의 영정을 걸어두고 향을 피우고 공양을 한다.
사실 지나가면서 본 나무 장이 부츠단인지 카미다나(神棚)인지 몰랐었다. 그래서 숙소에 와서 찾아보니, 내가 본 것은 조상을 모시는 부츠단이고 카미다나는 국가신을 모시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종교가 혼교주의라는 것 정도만 아는데, 이전에 크리스마스에 후쿠오카에 갔을 때 아무도 성탄절을 기리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일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종교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4.
우에노 공원에 도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JR 우에노 공원 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귀여운 빵을 팔고 있길래 본래의 목적이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까맣게 잊고 들어갔다.

우에노 공원의 핵심인 우에노 동물원을 컨셉으로 하는 빵이다. 이 베이커리 옆에 바로 붙어서 롯데리아도 있었는데 롯데리아에서도 우에노 한정으로 코알라 시리얼이 올라가는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배는 고프지만 곧 저녁 시간이라 빵 하나를 다 먹기는 부담스러웠고, 아까 가구라자카에서 페코짱야끼를 못 먹은 것과 아사쿠사에서 닌교야끼를 먹지 못한 서러움이 겹쳐서 결국 판다 야끼를 하나 샀다. 맛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커스타드 맛!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맛 없다.
빵은 따뜻한데도 퍽퍽했고, 커스타드는 한 군데 뭉쳐 있어서 질감이 무슨 팥앙금 같았다. 이건 뭐... 학교에서 집에 가는 삼각지역에서 산 델리만쥬를 다음 날 등교할 때 먹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맛이 없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누가 그런 건가. 왜 난 먹고자 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잊었던 건가....

5.
판다야끼에 실망한만큼 저녁을 잘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5시가 다 되어가고, 몸도 힘들어서 저녁은 최대한 숙소 가까운 곳에서 해결하고 바로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숙소 가까운 곳에서 아무데나 들어가기로 했다. 말이 '아무데나'이지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음식점을 고르는데 기준이 까다로워졌다.

첫째, 생맥주(生ビル, 나마비루)를 팔 것. 둘째, 오늘 고생했으니까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칼로리가 높은 음식. 셋째, 인터넷에서 추천하는 곳을 찾지 말고 내 눈으로 판별할 것.

배가 고파 죽겠는데 조건이 너무 많다. 이 조건을 다 생각해봤을 때 맞는 건 역시 라멘에 교자다. 아니면 야끼도리 정도.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라멘집과 야끼도리집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가게들을 지나치고 한참을 헤메이다가(숙소 주변에서만 거의 40분 정도) 결국 뭔가 심상치 않아보이는 라멘집이 보였다. 겉에는 뭔가 오래되어보이는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그 사진들을 자세히 보니까 옛날에 방송에 나온 적도 있나보다. 너무 허름해서 망설여졌지만, 빨간 국물에 매혹되어 들어갔다.
탄탄츠케멘을 파는 가게였다. 츠케멘은 면과 국물이 따로 나와서 면을 진한 국물에 찍어먹는 음식이다. 이 가게는 탄탄츠케멘 전문점으로 매운 탄탄멘 국물에 면을 찍어먹게 나온다.

가게 내부도 허름하다. 그래도 라멘야 답게 자판기로 계산한다. 그런데 자판기에 동전 넣는 곳을 막아놨다. 응? 난 동전 밖에 없는데?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그래서 결국 주인에게 죄송한데 동전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괜찮다고 동전으로 달라고 하셨다ㅋㅋㅋㅋ뭐지... 이럴거면 왜 자판기가 있는걸까?
여튼 그렇게 가장 작은 소 사이즈로 주문하고 계산을 했더니 주인이 辛さ(카라사, 맵기)를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봤다. 그제서야 맵기 단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고민을 하다가 제일 매운 단계인 極辛를 선택하자, 주인이 옆에서 뭐라뭐라고 말을 했다. 내가 못 알아듣고 ㅇㅅㅇ? 하는 표정으로 있으니까, 다시 친절하게 천천히 말하셨다(뜬금없지만 주인은 정말 만화에 나오는 라멘야 주인처럼 생겼다). 그런데도 못 알아들었다. 되려 주인이 곤란해보여서 "私、日本語が下手ですから、ちょっとゆっくり…(저 일본어를 잘 못해서요, 좀 천천히...)"라고 했더니 엄청나게 미안해하면서 "辛いことがとくいですか(매운거 잘 먹어요)?"라고 물어보셨다. 그제야 알아듣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알았다며 주방으로 가셨다. 주방에서 주방장과 둘이서 나에 대해 뭐라뭐라 말 하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어차피 들어도 못 알아들었을 거다. 조금 기다리니까 음식이 나왔다.

앗, 이런 아부랏뽀이 (油っぽい、기름진)한 비주얼의 국물이라니... 난 매운게 먹고 싶었는데, 이건 매워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기름기가 더 무서웠다. 나는 라멘도 기름때문에 돈코츠라멘보다는 미소나 시오를 좋아하는데... 그래도 내 인생 첫 츠케멘이니까 일단 먹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기름 져도 맛있어~!!@@ 이렇게나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고기 육수 국물 안에는 아지타마고(간이 된 일본식 삶은 계란)와 돼지 고기, 마늘, 파, 숙주가 들어가 있었는데 이 국물 맛이 장난이 아니다. 국물을 먼저 한 입 먹고 감동한 뒤에 면을 담가서 먹었는데 진짜 잘 어울렸다. 면의 두께가 일반 라멘보다는 더 두꺼운데 칼국수 면 같으면서도 얇지는 않고 쫀득쫀득했다.
워낙 매운걸 좋아해서 그런지 그렇게 맵지는 않았다. 이 정도가 "극 매운맛"이라니 좀 아쉬웠다. 앞으로 일본 생활하려면 이정도 매운맛에 만족해야하는 건가... 그래도 지금 맛있으니까 됐다.
잘 먹고 일어나서 주인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니,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かわいです!(귀여우세요)"라고 했다.
어허허헣? 허허허허허? 기분이 좋아지네? 룰루 댁도 귀여우세요 (*´ω`*)

6.
밥도 잘 먹었고, 귀엽다는 소리도 듣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이 기분이 너무 좋으면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된다. 숙소 앞 이온몰(슈퍼)에 들러서 과자와 맥주를 샀다. 과자는 내가 지금 행복하니까 "幸せバタ味(행복버터맛)"감자 칩, 그리고 산토리 가을 맥주!

그렇게 하루를 또 마무리한다.

어제 등산 한 것도 모자라서 오늘도 무리해서 걸었다. 휴대폰 걸음 체크 기능을 보니 4만 보를 넘게 걸었더라... 최고 기록 경신이다. 내일 아침 일어날 때 다리 아플 게 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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