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보초를 나와서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덕후들의 성지라는 아키하바라! 만화는 많이 보는 편이지만 아키하바라에 있을 법한 애니메를 보지는 않아서 '이거를 반드시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전자제품에도 그닥 관심이 없어서... 아키하바라에서 내가 둘러볼 곳은 돈키호테정도 였다. 돈키호테라면 일본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닌가 하겠지만, 아키하바라의 돈키호테는 조금 다르다. 다른 매장보다 코스프레 옷이 훨씬 더 많다...ㅋㅋㅋㅋ 그리고 8층에는 아키하바라의 딸들 AKB48극장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 AKB48은 조금 허접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는 대형 가수다. 한국 아이돌들이 워낙 몇 년씩 준비를 하고 나오기도 하고, 손에 닿을 수 없지만 친근한 '스타'를 컨셉으로 한다. 반면, AKB48은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컨셉으로 돈키호테의 아키하바라 점 8층에 위치한 전용 극장인 AKB48 극장에서 상시 라이브 공연을 열고 있다. AKB자체가 '아키하바라'의 약자다. 자매 그룹으로 일본내에 SKE48, NMB48, HKT48, NGT48이 있다. 다 난바, 하카타 같은 일본의 유명 거리의 약자다. 해외에도 있다고 하니 규모가 엄청나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SOL48해서 서울에도 생길지 모른다.

이곳이 바로 AKB48극장이다. 삼촌팬들만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심지어 당일 티켓 예매는 불가능하다. 온 김에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예전에 나도 아이돌 보러 방송국 가고 그랬었는데... 너무 멀긴 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더 넓으니까 더 보러 가기 힘들겠지? 그래서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이나 키우는 아이돌 컨셉이 잘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2.
아키하바라를 나와서 아사쿠사로 향했다. 이 때부터 걷는 게 엄청나게 힘들어졌다. 중간중간 공예점이나 예쁜 가게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오후 2시라서 햇빛도 뜨겁고 점점 지쳐갔다. 아사쿠사에 가서 닌교야끼를 먹을 생각으로 겨우겨우 버텼다.

그렇게 도착한 아사쿠사가...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전쟁터에 가까웠다. 그 동안 관광객이 많은 곳을 갈 일이 없었던 터라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온 것이 낯설었다. 여행 중이 아니라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 것을 꺼려하는데 저길 뚫고 지나가야 한다니. 굳게 결심하고 어쨌든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돌아 나왔다. 인파에 치여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나의 닌교야끼.... 흑.... 닌교야끼를 생각하며 버텼는데ㅠㅠ

3.
그렇게 실망감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이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여기서 멀지 않고 숙소에 가는 길이기도 한 우에노 공원으로 결정했다. 공원이면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도 팔거고 그걸 먹으면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 길에 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는 없지만,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자주 나오는 집에 조상을 모시는 그 나무 장 같은 것을 파는 거리가 있었다. 그 나무 장 같은 것은 '부츠단(仏壇)'이라고 하는데 조상의 영정을 걸어두고 향을 피우고 공양을 한다.
사실 지나가면서 본 나무 장이 부츠단인지 카미다나(神棚)인지 몰랐었다. 그래서 숙소에 와서 찾아보니, 내가 본 것은 조상을 모시는 부츠단이고 카미다나는 국가신을 모시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종교가 혼교주의라는 것 정도만 아는데, 이전에 크리스마스에 후쿠오카에 갔을 때 아무도 성탄절을 기리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일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종교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4.
우에노 공원에 도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JR 우에노 공원 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귀여운 빵을 팔고 있길래 본래의 목적이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까맣게 잊고 들어갔다.

우에노 공원의 핵심인 우에노 동물원을 컨셉으로 하는 빵이다. 이 베이커리 옆에 바로 붙어서 롯데리아도 있었는데 롯데리아에서도 우에노 한정으로 코알라 시리얼이 올라가는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배는 고프지만 곧 저녁 시간이라 빵 하나를 다 먹기는 부담스러웠고, 아까 가구라자카에서 페코짱야끼를 못 먹은 것과 아사쿠사에서 닌교야끼를 먹지 못한 서러움이 겹쳐서 결국 판다 야끼를 하나 샀다. 맛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커스타드 맛!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맛 없다.
빵은 따뜻한데도 퍽퍽했고, 커스타드는 한 군데 뭉쳐 있어서 질감이 무슨 팥앙금 같았다. 이건 뭐... 학교에서 집에 가는 삼각지역에서 산 델리만쥬를 다음 날 등교할 때 먹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맛이 없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누가 그런 건가. 왜 난 먹고자 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잊었던 건가....

5.
판다야끼에 실망한만큼 저녁을 잘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5시가 다 되어가고, 몸도 힘들어서 저녁은 최대한 숙소 가까운 곳에서 해결하고 바로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숙소 가까운 곳에서 아무데나 들어가기로 했다. 말이 '아무데나'이지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음식점을 고르는데 기준이 까다로워졌다.

첫째, 생맥주(生ビル, 나마비루)를 팔 것. 둘째, 오늘 고생했으니까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칼로리가 높은 음식. 셋째, 인터넷에서 추천하는 곳을 찾지 말고 내 눈으로 판별할 것.

배가 고파 죽겠는데 조건이 너무 많다. 이 조건을 다 생각해봤을 때 맞는 건 역시 라멘에 교자다. 아니면 야끼도리 정도.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라멘집과 야끼도리집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가게들을 지나치고 한참을 헤메이다가(숙소 주변에서만 거의 40분 정도) 결국 뭔가 심상치 않아보이는 라멘집이 보였다. 겉에는 뭔가 오래되어보이는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그 사진들을 자세히 보니까 옛날에 방송에 나온 적도 있나보다. 너무 허름해서 망설여졌지만, 빨간 국물에 매혹되어 들어갔다.
탄탄츠케멘을 파는 가게였다. 츠케멘은 면과 국물이 따로 나와서 면을 진한 국물에 찍어먹는 음식이다. 이 가게는 탄탄츠케멘 전문점으로 매운 탄탄멘 국물에 면을 찍어먹게 나온다.

가게 내부도 허름하다. 그래도 라멘야 답게 자판기로 계산한다. 그런데 자판기에 동전 넣는 곳을 막아놨다. 응? 난 동전 밖에 없는데?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그래서 결국 주인에게 죄송한데 동전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괜찮다고 동전으로 달라고 하셨다ㅋㅋㅋㅋ뭐지... 이럴거면 왜 자판기가 있는걸까?
여튼 그렇게 가장 작은 소 사이즈로 주문하고 계산을 했더니 주인이 辛さ(카라사, 맵기)를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봤다. 그제서야 맵기 단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고민을 하다가 제일 매운 단계인 極辛를 선택하자, 주인이 옆에서 뭐라뭐라고 말을 했다. 내가 못 알아듣고 ㅇㅅㅇ? 하는 표정으로 있으니까, 다시 친절하게 천천히 말하셨다(뜬금없지만 주인은 정말 만화에 나오는 라멘야 주인처럼 생겼다). 그런데도 못 알아들었다. 되려 주인이 곤란해보여서 "私、日本語が下手ですから、ちょっとゆっくり…(저 일본어를 잘 못해서요, 좀 천천히...)"라고 했더니 엄청나게 미안해하면서 "辛いことがとくいですか(매운거 잘 먹어요)?"라고 물어보셨다. 그제야 알아듣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알았다며 주방으로 가셨다. 주방에서 주방장과 둘이서 나에 대해 뭐라뭐라 말 하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어차피 들어도 못 알아들었을 거다. 조금 기다리니까 음식이 나왔다.

앗, 이런 아부랏뽀이 (油っぽい、기름진)한 비주얼의 국물이라니... 난 매운게 먹고 싶었는데, 이건 매워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기름기가 더 무서웠다. 나는 라멘도 기름때문에 돈코츠라멘보다는 미소나 시오를 좋아하는데... 그래도 내 인생 첫 츠케멘이니까 일단 먹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기름 져도 맛있어~!!@@ 이렇게나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고기 육수 국물 안에는 아지타마고(간이 된 일본식 삶은 계란)와 돼지 고기, 마늘, 파, 숙주가 들어가 있었는데 이 국물 맛이 장난이 아니다. 국물을 먼저 한 입 먹고 감동한 뒤에 면을 담가서 먹었는데 진짜 잘 어울렸다. 면의 두께가 일반 라멘보다는 더 두꺼운데 칼국수 면 같으면서도 얇지는 않고 쫀득쫀득했다.
워낙 매운걸 좋아해서 그런지 그렇게 맵지는 않았다. 이 정도가 "극 매운맛"이라니 좀 아쉬웠다. 앞으로 일본 생활하려면 이정도 매운맛에 만족해야하는 건가... 그래도 지금 맛있으니까 됐다.
잘 먹고 일어나서 주인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니,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かわいです!(귀여우세요)"라고 했다.
어허허헣? 허허허허허? 기분이 좋아지네? 룰루 댁도 귀여우세요 (*´ω`*)

6.
밥도 잘 먹었고, 귀엽다는 소리도 듣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이 기분이 너무 좋으면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된다. 숙소 앞 이온몰(슈퍼)에 들러서 과자와 맥주를 샀다. 과자는 내가 지금 행복하니까 "幸せバタ味(행복버터맛)"감자 칩, 그리고 산토리 가을 맥주!

그렇게 하루를 또 마무리한다.

어제 등산 한 것도 모자라서 오늘도 무리해서 걸었다. 휴대폰 걸음 체크 기능을 보니 4만 보를 넘게 걸었더라... 최고 기록 경신이다. 내일 아침 일어날 때 다리 아플 게 겁난다.
1.
또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났다. 어제 12시가 다 되어서 잤지만 등산의 후유증인가... 온 몸이 쑤셔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내 몸에 이런 근육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은 근육들마저 아팠다.
오늘도 계속 걸어야 하는데 몸 상태를 봐서는 무리일 것 같았다. 그래서 계획을 변경하고 일찍 일어난 김에 츠키지 시장에 갈까 했지만, 정성들여 만든 일정표이기고 하고 바꾸는 게 더 귀찮아서 그냥 예정대로 가기로 했다.

숙소 바로 앞에 역이 있기 때문에 편하게 지하철로도 갈 수 있지만, JR은 신물이 날 정도로 타기 때문에 버스로 가는 여정을 택했다.

2.
그렇게 버스를 타고 도착한 첫 번째 목적지는 와세다 대학 (早稲田大学)이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8시 조금 전이었는데, 신기하게 학교 정문이 닫혀 있었다. 8시 정각이 되자 종이 울리면서 문을 열었다. 마침 입학시험이 있는 날이었어서 일찍 도착한 수험생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도 학생인 척 들어갔다.

와세다 대학교를 일정에 넣은 이유는 내가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게 된 계기라고 까지 말 할 수 있는(지금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연극과를 졸업했고, 가장 좋아하는 일본 배우인 사카이 마사토가 와세다 대학 중어중문학과 중퇴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와세다 출신이라는 것 만으로도 찾아올 가치는 충분했다.
와세다 대학의 앞은 우리 학교 앞과 마찬가지로 서브웨이도 있고 맥도날드도 있었다. 다른 점은 커리 가게가 정말 많았다. 와세다 대학 학생들은 커리를 좋아하나 보다...

3.
와세다 대학을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가구라자카까지 걸을 예정이었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으로 맥주와 오징어 안주를 먹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다. 무엇보다도 커피가 먹고 싶었다. 가구라자카에 거의 다 와갈 때쯤 210엔에 아이스 커피를 파는 카페가 보여서 들어갔다.

카페 벨로체인데 오늘 하루 종일 걸으면서 네 번은 본 것 같다. 한국의 이디야 수준이다. 저렴하고 보편적이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린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구라자카에 도착했다. '자카'라는 것 자체가 일본어로 坂(사카, 언덕)라는 말이기 때문에 경사가 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부터 내려간 거라 힘들지는 않았다. 가구라자카는 옛 일본의 유흥가? 같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외국 음식점들이 자리 잡았다. 내가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한데, 아라시의 니노미야가 출연한 <삼가아뢰옵니다, 아버님>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전통 일식집이라든지, 예전에 게이샤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생활을 알 수 있다. 

여기가 바로 드라마 속에서 니노미야가 상경한 칸쟈니의 요코하마를 기다리던 곳...!
뭔가 두근두근 했다.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심경이 이해가 갔다. 안에 들어가니 아라시 팬들이 다녀 간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쉽게 찾았던 '링고 계단'. 드라마 속에서 여주인공이 사과 바구니를 놓쳐서 사과들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잇페이 (니노미야)가 주워주며 첫눈에 반한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예쁜 계단이다.

가구라자카는 좁은 골목과 돌 바닥으로도 유명하지만, 간식 거리도 많다. 점심을 먹기 위해 먹지는 않았지만, 지나가면서 슈크림으로 유명한 베이커리 COMPAIN과 일본 유일의 페코짱야끼를 파는 FUJIYA도 볼 수 있었다.

4.
가구라자카를 지나 진보초까지 걸었다.

일본어 활자를 읽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서점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도쿄에 오면 꼭 진보초 고서점 거리를 와보고 싶었는데, 읽을 줄을 모르니 그림의 떡이었다. 결국 책의 거리인 진보초는 나에게 점심을 먹는 곳이 되어버렸다.
아쉽기는 하지만 나의 무지함을 탓할 수 밖에.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음식이 저렴하다. 그래서 대학가나 도서관 근처는 먹을 게 많다. 지식으로 배를 채워서 인가... 그보다는 공부하면 돈을 벌지 못해서 그런 거 같다ㅎㅎㅎ

진보초하면 '사보루'와 카레 거리가 유명하지만, 내가 점심 먹을 곳으로 택한 곳은 하루키의 단골집이었던 덴푸라이모야(天ぷらいもや)다.

진보초는 애초에 주변에 대학가가 있기 때문에 형성된 책의 거리다. 그래서 대학생이었던 하루키도 이 곳에 자주 왔다. 그리고 그가 즐겨 먹었다는 700엔 짜리 덴푸라 정식을 파는 '덴푸라 이모야'.
자세한 설명은 http://naver.me/FxizcWF0 여기에 나와 있다.

내가 찾아 간 시간은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다. 손님은 4팀 정도로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메뉴는 덴푸라 정식과 에비 정식 두 가지다. 주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튀기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차와 된장국, 밥을 준비해준다.
이 된장국과 밥이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된장국에는 대첩인가 제첩인가... 여튼 작은 조개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밥은 찰기가 이제껏 먹어본 것과 달랐다. 밥과 국이 너무 맛있어서 덴푸라가 맛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덴푸라마저 감탄을 하게 했다. 튀기자마자 그릇에 올려줘서 기름이 남아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평소에 먹던 누런 튀김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번만 튀긴 데에다가 오래 기름에 담근 것도 아니어서 뽀얀 흰 색에 가까운 빛깔에 반죽은 두껍지 않고 눈꽃처럼 피어 있었다. 덴푸라 정식의 구성은 가지, 고구마, 가자미 (혹은 전갱이... 여튼 납작한 생선), 오징어, 새우가 각각 1개 씩이다. 가장 맛있었던 것은 전갱이인지 가자미인지 모르는 튀김이다.

그렇게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그래도 진보초에 왔는데 서점 한 군데 정도는 들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눈 앞에 있는 서점을 들어갔다.
앗, 그런데 안이 심상치가 않았다. 양쪽에는 고양이 사진과 일러스트가 붙어 있었고, 진열대에 있는 책들은 모두 고양이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고양이 관련한 서적만 취급하는 '고양이 전문 서점'이었던 것이다.
밖에서 보기에는 궁서체 한자로 간판이 되어 있어서 전혀 몰랐다. 
재미나게 구경을 하고 엽서를 구매하며 주인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허락해 주셨다.

아무튼 진보초는 재미난 곳이다.

다음 편에 계속...
1.
어제 후지산까지 차로 데려다 주는 서비스를 예약했던 5명 중 한 명도 늦지 않고 새벽 5시 반에 게스트 하우스 앞에 모였다.

어제는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게스트하우스의 내부 만큼이나 외부도 편안한 분위기다.

2.
호스트가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 사람들에게 말도 붙이면서 후지노미야 고고메까지 갔다. 가는 중간에 도착하기 전 호스트는 마지막 편의점이라면서 패밀리마트에 들렸는데, 나도 어제 장갑을 사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사러 들어갔다. 근데 진열대에서 장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에서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기 때문에 천천히 물건을 다시 살펴볼 여유도 없어서, 결국 함께 차를 타는 일행에게 물어봤다.
문제는 내가 '장갑'을 일본어로 모른다는 거다. 배운 기억이 없는 걸?... 양말은 아는데, 장갑은 뭐지?.... 그래서 결국 "え…すみません…なんか、手に着るもの… グローブみたいの…(저 죄송한데 뭐지, 손에 입는 거, 글러브 같은 거)"라고 말았다. 손에 입는 거라니...  끼는 것도 아니고... 왜 그 순간 つける라는 단어는 생각이 안났을까... 글러브라니... ㅜㅜ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그래도 그 예쁜 일행은 용케 알아들었다. (도와줘서 예쁜 게 아니라 정말 예쁘게 생겼다. 아침에 마주칠 때 부터 예쁘다고 생각했다.) "グローブ?ああ!軍手!" 그렇다. 장갑은 軍手(군테)다. 처음 알았지만 마치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뻔뻔하게 "あ、そうです!軍手ですねー"라고 대답했다. 결국 그 분이 점원에게 물어서 군테를 찾아 줬다. 친절하게 고무가 있는 군테와 그냥 군테 (목장갑)의 설명까지 해주었다.

진심으로 감사해요, 예쁜 등산객님. 누가 말해도 리액션도 참 잘 해주시던데 분명 사랑 받는 사람일거에요. 조심해서 등산하길 바랍니다♡♡♡

3.

후지산 고고메로 가는 길에 호스트가 가장 후지산이 잘 보이는 포인트라면서 차를 멈췄다. 정말 예쁘게 잘 보였다. 해가 뜨는 하늘의 노란 빛과 어우러져서 최고의 풍경을 만들었다.
호스트가 근래에 들어 오늘이 가장 좋은 날씨라고 했다. 후지산 등반은 날씨로 인해 9월 10일까지로 제한이 있다. 그래서 9월 초순부터 날씨가 안 좋을 때가 많기 때문에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근데 오늘은 날씨도 좋고, 옆에 지나가는 버스를 보니까 사람도 많다고 이상한 날이라고 했다.

4.

호스트와 헤어지고 일행들은 신발 끈을 고쳐 매고 "気をつけて!(조심해요)"를 외치고 각자의 산행을 시작했다. 이 때가 오전 7시 쯤이었다. 후지노미야 등산로는 고고메(5합목)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상까지 가는 코스다. 안내서에는 등산에 약 5시간, 하산에 약 3시간 소요된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만약 늦어지면 정상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중도 하산해야 오늘 중으로 도쿄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즐겁게 등산을 시작했다.
추울 줄 알고 챙겨간 핫팩은 커녕 중간에 바람막이도 벗어서 가방에 넣었다.



풍경은 예뻤지만, 신나나고메(신 7합목, 합목마다 휴게소와 산장이 있다)까지는 '뭐 이렇게 재미 없는 산행이 다 있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은 까만 모래와 자갈 밖에 없었고 급경사나 이런 것도 없이 죽 오르막길만 있어서 재미 없이 힘들기만 했다. 그런 길을 걷고 있으려니까 내가 왜 이 산을 오른다고 했을까 후회가 되었다. 온 것만 해도 충분하니까 그냥 내려가 버릴까라는 생각도 했다. 혼자 하는 산행은 위험하다. 조난 위험도 그렇지만, 이런 유명한 산에 사람이 없을 리는 없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말려줄 사람이 없는 게 제일 위험하다.
신나나고메부터 간소나나고메(원조 7합목)까지 가는 길은 땅이 조금 더 가파라지고 자갈도 돌로 바뀌었다. 슬슬 힘에 부쳤다. 그런데도 뭔가 산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작은 돌이 많아서 내려올 때 정말 미끄러지기 쉽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간소나나고메에 멈춰서 쉬고 있을 때 아까 게스트 하우스 차를 같이 탔던 아저씨를 만났다. 나는 같이 있던 일행 중에 가장 빨리 올라 와서 쉬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아저씨는 나보고 참 잘 올라간다면서 経験(경험)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경험이라고 한다면 어릴 때부터 가족끼리 등산을 갔던 것과 올해 초에 동아리에서 같이 인왕산을 두 번인가 올랐던 건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듣는 사람도 이런 구체적이고 긴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동아리 활동으로 등산을 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등산 동아리였냐고 물어보셨다. 아니라고 하고 이러저러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그래서 맞다고 하면서 일본에 유학 오기 전(호스트의 설명으로 내가 유학생이라는 것은 일행이 모두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등산 동아리 였다고 했다.
연극 동아리가 어쩌다 등산 동아리가 되어 버렸다.... 뭐 어쨌든 동아리 사람들이랑 등산 했던 건 맞으니까? 사람이 힘든 상황에서 외국어를 해야 한다면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저씨는 나의 괴로움을 알아 채지 못하셨는지 "그럼 왜 후지산에 오르냐"고 물어 보셨다. 아, 이건 간단히 대답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일본을 대표하는 산이니까 일본에 살게 되면 꼭 한 번 오르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夢だった?(꿈이었어?)"라고 물어보셨다. 응? 꿈? 꿈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고 그냥 '해보면 좋겠다' 정도 였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자신도 어릴 적 부터 꿈이었다고, 그런데 이 나이가 되도록 못 올라오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でも、今日夢を叶えるんですね~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그래도 오늘 꿈을 이루네요 축하드려요)" 대답했다. 근래에 일본어로 한 말 중에 가장 적절한 대답이었던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래도 말이 더 길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오사키니 (먼저 갈게요)!" 하고 일어났다.

5.

하치고고메 (8합목)에서는 단체 등산객이 있어서 쉬지 못했다. 그 영향인지 하치고고메에서 큐고고메 (9합목)으로 향하는 길이 정말 힘들었다.
어제 저녁으로 맥주를 먹고 바로 잔 데에다가, 오늘 새벽 5시에 커피 한 잔 마신 게 전부였기 때문에 배도 고팠다. 그래도 정상에 가서 개운한 마음으로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물만 마시고 올라가기로 했다.
후지산에 화장실은 친환경 화장실로 조성되어 있다. '친환경'이란 단어는 굉장히 극단적인 단어이다. '에코'라는 말로 엄청나게 고급스럽게 팔리는 상품이 되거나, 또 다른 하나는 '자연 그대로' 즉, 구식의 불편함이다. 후지산의 친환경 화장실은 후자다. 그나마도 시즈오카 현의 노력으로 나아진 것이지 옛날에는 후지산에 "흰 강"이 흐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등산객의 용변으로 오염되었었다고 한다.
이 친환경 화장실의 관리를 위해 사용시에는 200엔을 내야 한다.
나는 '구식의' 친환경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200엔을 내는 것은 조금 아깝기 때문에 아침부터 되도록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등산을 하는 동안에도 어제 편의점에서 구매한 500ml의  보리차만 한 통 마셨다.

6.

큐고메부터 큐고고사쿠 (9.5합목)까지 오르는 데에는 정말 이러다가 죽나 싶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현기증을 느껴서 '이게 고산병인가?' 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배가 고픈 거였다. 큐고고사쿠에서 안 먹었다간 정상에 가보지도 못하고 쓰러지겠다 싶어서 결국 준비해간 오니기리와 푸딩을 꺼냈다.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명란 오니기리 (130엔)를 구름 위에서 먹는 기분이란... 정말 최고였다! 오니기리는 정말 맛있고, 맛있고, 또 맛있었다. 나의 표현력으로는 이렇게 밖에 말 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체 하지 않으려고 꼭꼭 오래 씹어 먹었다.
디저트로 챙겨온 커피 푸딩은 더운 날씨 때문인지, 내가 등산을 하며 너무 흔들었기 때문인지 카라멜이 조금 새버렸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간단한 식사인데 만족감은 엄청났다. 역시 고생 뒤에 배고플 때 먹는 음식만큼 맛있는 것은 없나보다. 시장이 반찬이다.

7.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큐고고사쿠에서 정상까지는 별로 힘들지 않게 갔다.



후지산 정상을 둘러보다보니 점심을 여기서 안 먹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보다도 오히려 각각 고고메들의 풍경이 특징 있고 예뻤다. 정상은 역시 성취감이다. 분화구를 도는 것은 안 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면 내려갈 힘이 없을 것 같았다.
정상에 올랐을 때의 시간은 10시 30분 정도였다. 3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오른 것이다. 이대로라면 후지노미야에 가서 야끼소바를 먹거나 일찍 도쿄로 출발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신이 나서 하산을 시작했다. 후지산의 등산이 괴로움과 인내라면 하산은 위험함이다. 정말 너무 미끄러워서 다섯 번인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가 등산화가 아닌 워킹화를 신은 탓도 있지만 작은 돌맹이들이 워낙 많아서 낙석의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내려갈 때는 갑자기 안개가 많이 껴서 다음 고고메가 보이지 않았다.


8.
12시 40분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며 후지산 등반을 마쳤다. 등산부터 하산까지 총 5시간 40분이 걸렸다. 1시 30분에 후지노미야역, 후지역, 신후지역 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서 2030원에 표를 샀다.
버스에 앉은 순간부터 창문에 머리를 부딪힐 정도로 졸다 보니 어느새 후지노미야 시내였다. 버스 창문을 통해 시내구경을 하고 3시가 넘어서 후지노미야 역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빨랐기 때문에 후지노미야 명물인 야끼소바를 먹으러 갈지, 일찍 도쿄로 갈 지 선택해야 했다.
한국에서부터 엄청나게 기대했던 후지노미야 야끼소바학회였지만, 일찍 도쿄에 가서 씻고 쉬고 싶었다. 야끼소바학회까지 15분을 걸어가기에는 이미 후들거리고 있는 내 다리에게 무리였다.
그래서 바로 짐을 맡겨 놨던 게스트하우스 토키와에 가서 짐을 찾고 후지노미야 역으로 향했다. 청춘 18티켓을 이용하기 때문에 3시 42분 기차를 타야 했다. 그래서 일단 슈퍼에 들러서 요기 거리를 샀다. 등산하느라 힘들었을 몸을 위해 좋은 것을 잘 먹고 싶었지만, 기차 시간을 위해 결국 또 주변에 있는 슈퍼에 들어갔다.


편의점이 아니라 병원 안에 있는 매점 같은 슈퍼였는데, 직접 만든 빵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특이한 멘치카츠 샌드위치와 요구르트를 샀다. 기차에서 먹는데 이마저도 맛있다. 요구르트는 그냥 불가리아 요구르트인데 뭐가 이리 맛있는 거지? 멘치카츠도 사실 그냥 잡고기를 튀긴 것 뿐인데 맛있었다. 고기보다도 안에 있는 초록색 야채가 뭔지 모르겠는데 감칠맛이 났다. 키치죠지에 가서 먹을 멘치카츠가 기대된다.

이렇게 정신 없이 후지산 등반이 끝났고, 후지노미야를 떠난다.

등반 자체도 의미있지만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 따뜻했고, 등산을 하면서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오하이요 고자이마스~" "곤니치와~"를 하도 많이 해서 평생 할 인사를 다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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