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후지산까지 차로 데려다 주는 서비스를 예약했던 5명 중 한 명도 늦지 않고 새벽 5시 반에 게스트 하우스 앞에 모였다.

어제는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게스트하우스의 내부 만큼이나 외부도 편안한 분위기다.

2.
호스트가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 사람들에게 말도 붙이면서 후지노미야 고고메까지 갔다. 가는 중간에 도착하기 전 호스트는 마지막 편의점이라면서 패밀리마트에 들렸는데, 나도 어제 장갑을 사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사러 들어갔다. 근데 진열대에서 장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에서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기 때문에 천천히 물건을 다시 살펴볼 여유도 없어서, 결국 함께 차를 타는 일행에게 물어봤다.
문제는 내가 '장갑'을 일본어로 모른다는 거다. 배운 기억이 없는 걸?... 양말은 아는데, 장갑은 뭐지?.... 그래서 결국 "え…すみません…なんか、手に着るもの… グローブみたいの…(저 죄송한데 뭐지, 손에 입는 거, 글러브 같은 거)"라고 말았다. 손에 입는 거라니...  끼는 것도 아니고... 왜 그 순간 つける라는 단어는 생각이 안났을까... 글러브라니... ㅜㅜ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그래도 그 예쁜 일행은 용케 알아들었다. (도와줘서 예쁜 게 아니라 정말 예쁘게 생겼다. 아침에 마주칠 때 부터 예쁘다고 생각했다.) "グローブ?ああ!軍手!" 그렇다. 장갑은 軍手(군테)다. 처음 알았지만 마치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뻔뻔하게 "あ、そうです!軍手ですねー"라고 대답했다. 결국 그 분이 점원에게 물어서 군테를 찾아 줬다. 친절하게 고무가 있는 군테와 그냥 군테 (목장갑)의 설명까지 해주었다.

진심으로 감사해요, 예쁜 등산객님. 누가 말해도 리액션도 참 잘 해주시던데 분명 사랑 받는 사람일거에요. 조심해서 등산하길 바랍니다♡♡♡

3.

후지산 고고메로 가는 길에 호스트가 가장 후지산이 잘 보이는 포인트라면서 차를 멈췄다. 정말 예쁘게 잘 보였다. 해가 뜨는 하늘의 노란 빛과 어우러져서 최고의 풍경을 만들었다.
호스트가 근래에 들어 오늘이 가장 좋은 날씨라고 했다. 후지산 등반은 날씨로 인해 9월 10일까지로 제한이 있다. 그래서 9월 초순부터 날씨가 안 좋을 때가 많기 때문에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근데 오늘은 날씨도 좋고, 옆에 지나가는 버스를 보니까 사람도 많다고 이상한 날이라고 했다.

4.

호스트와 헤어지고 일행들은 신발 끈을 고쳐 매고 "気をつけて!(조심해요)"를 외치고 각자의 산행을 시작했다. 이 때가 오전 7시 쯤이었다. 후지노미야 등산로는 고고메(5합목)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상까지 가는 코스다. 안내서에는 등산에 약 5시간, 하산에 약 3시간 소요된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만약 늦어지면 정상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중도 하산해야 오늘 중으로 도쿄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즐겁게 등산을 시작했다.
추울 줄 알고 챙겨간 핫팩은 커녕 중간에 바람막이도 벗어서 가방에 넣었다.



풍경은 예뻤지만, 신나나고메(신 7합목, 합목마다 휴게소와 산장이 있다)까지는 '뭐 이렇게 재미 없는 산행이 다 있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은 까만 모래와 자갈 밖에 없었고 급경사나 이런 것도 없이 죽 오르막길만 있어서 재미 없이 힘들기만 했다. 그런 길을 걷고 있으려니까 내가 왜 이 산을 오른다고 했을까 후회가 되었다. 온 것만 해도 충분하니까 그냥 내려가 버릴까라는 생각도 했다. 혼자 하는 산행은 위험하다. 조난 위험도 그렇지만, 이런 유명한 산에 사람이 없을 리는 없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말려줄 사람이 없는 게 제일 위험하다.
신나나고메부터 간소나나고메(원조 7합목)까지 가는 길은 땅이 조금 더 가파라지고 자갈도 돌로 바뀌었다. 슬슬 힘에 부쳤다. 그런데도 뭔가 산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작은 돌이 많아서 내려올 때 정말 미끄러지기 쉽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간소나나고메에 멈춰서 쉬고 있을 때 아까 게스트 하우스 차를 같이 탔던 아저씨를 만났다. 나는 같이 있던 일행 중에 가장 빨리 올라 와서 쉬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아저씨는 나보고 참 잘 올라간다면서 経験(경험)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경험이라고 한다면 어릴 때부터 가족끼리 등산을 갔던 것과 올해 초에 동아리에서 같이 인왕산을 두 번인가 올랐던 건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듣는 사람도 이런 구체적이고 긴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동아리 활동으로 등산을 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등산 동아리였냐고 물어보셨다. 아니라고 하고 이러저러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그래서 맞다고 하면서 일본에 유학 오기 전(호스트의 설명으로 내가 유학생이라는 것은 일행이 모두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등산 동아리 였다고 했다.
연극 동아리가 어쩌다 등산 동아리가 되어 버렸다.... 뭐 어쨌든 동아리 사람들이랑 등산 했던 건 맞으니까? 사람이 힘든 상황에서 외국어를 해야 한다면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저씨는 나의 괴로움을 알아 채지 못하셨는지 "그럼 왜 후지산에 오르냐"고 물어 보셨다. 아, 이건 간단히 대답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일본을 대표하는 산이니까 일본에 살게 되면 꼭 한 번 오르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夢だった?(꿈이었어?)"라고 물어보셨다. 응? 꿈? 꿈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고 그냥 '해보면 좋겠다' 정도 였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자신도 어릴 적 부터 꿈이었다고, 그런데 이 나이가 되도록 못 올라오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でも、今日夢を叶えるんですね~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그래도 오늘 꿈을 이루네요 축하드려요)" 대답했다. 근래에 일본어로 한 말 중에 가장 적절한 대답이었던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래도 말이 더 길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오사키니 (먼저 갈게요)!" 하고 일어났다.

5.

하치고고메 (8합목)에서는 단체 등산객이 있어서 쉬지 못했다. 그 영향인지 하치고고메에서 큐고고메 (9합목)으로 향하는 길이 정말 힘들었다.
어제 저녁으로 맥주를 먹고 바로 잔 데에다가, 오늘 새벽 5시에 커피 한 잔 마신 게 전부였기 때문에 배도 고팠다. 그래도 정상에 가서 개운한 마음으로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물만 마시고 올라가기로 했다.
후지산에 화장실은 친환경 화장실로 조성되어 있다. '친환경'이란 단어는 굉장히 극단적인 단어이다. '에코'라는 말로 엄청나게 고급스럽게 팔리는 상품이 되거나, 또 다른 하나는 '자연 그대로' 즉, 구식의 불편함이다. 후지산의 친환경 화장실은 후자다. 그나마도 시즈오카 현의 노력으로 나아진 것이지 옛날에는 후지산에 "흰 강"이 흐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등산객의 용변으로 오염되었었다고 한다.
이 친환경 화장실의 관리를 위해 사용시에는 200엔을 내야 한다.
나는 '구식의' 친환경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200엔을 내는 것은 조금 아깝기 때문에 아침부터 되도록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등산을 하는 동안에도 어제 편의점에서 구매한 500ml의  보리차만 한 통 마셨다.

6.

큐고메부터 큐고고사쿠 (9.5합목)까지 오르는 데에는 정말 이러다가 죽나 싶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현기증을 느껴서 '이게 고산병인가?' 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배가 고픈 거였다. 큐고고사쿠에서 안 먹었다간 정상에 가보지도 못하고 쓰러지겠다 싶어서 결국 준비해간 오니기리와 푸딩을 꺼냈다.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명란 오니기리 (130엔)를 구름 위에서 먹는 기분이란... 정말 최고였다! 오니기리는 정말 맛있고, 맛있고, 또 맛있었다. 나의 표현력으로는 이렇게 밖에 말 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체 하지 않으려고 꼭꼭 오래 씹어 먹었다.
디저트로 챙겨온 커피 푸딩은 더운 날씨 때문인지, 내가 등산을 하며 너무 흔들었기 때문인지 카라멜이 조금 새버렸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간단한 식사인데 만족감은 엄청났다. 역시 고생 뒤에 배고플 때 먹는 음식만큼 맛있는 것은 없나보다. 시장이 반찬이다.

7.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큐고고사쿠에서 정상까지는 별로 힘들지 않게 갔다.



후지산 정상을 둘러보다보니 점심을 여기서 안 먹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보다도 오히려 각각 고고메들의 풍경이 특징 있고 예뻤다. 정상은 역시 성취감이다. 분화구를 도는 것은 안 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면 내려갈 힘이 없을 것 같았다.
정상에 올랐을 때의 시간은 10시 30분 정도였다. 3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오른 것이다. 이대로라면 후지노미야에 가서 야끼소바를 먹거나 일찍 도쿄로 출발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신이 나서 하산을 시작했다. 후지산의 등산이 괴로움과 인내라면 하산은 위험함이다. 정말 너무 미끄러워서 다섯 번인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가 등산화가 아닌 워킹화를 신은 탓도 있지만 작은 돌맹이들이 워낙 많아서 낙석의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내려갈 때는 갑자기 안개가 많이 껴서 다음 고고메가 보이지 않았다.


8.
12시 40분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며 후지산 등반을 마쳤다. 등산부터 하산까지 총 5시간 40분이 걸렸다. 1시 30분에 후지노미야역, 후지역, 신후지역 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서 2030원에 표를 샀다.
버스에 앉은 순간부터 창문에 머리를 부딪힐 정도로 졸다 보니 어느새 후지노미야 시내였다. 버스 창문을 통해 시내구경을 하고 3시가 넘어서 후지노미야 역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빨랐기 때문에 후지노미야 명물인 야끼소바를 먹으러 갈지, 일찍 도쿄로 갈 지 선택해야 했다.
한국에서부터 엄청나게 기대했던 후지노미야 야끼소바학회였지만, 일찍 도쿄에 가서 씻고 쉬고 싶었다. 야끼소바학회까지 15분을 걸어가기에는 이미 후들거리고 있는 내 다리에게 무리였다.
그래서 바로 짐을 맡겨 놨던 게스트하우스 토키와에 가서 짐을 찾고 후지노미야 역으로 향했다. 청춘 18티켓을 이용하기 때문에 3시 42분 기차를 타야 했다. 그래서 일단 슈퍼에 들러서 요기 거리를 샀다. 등산하느라 힘들었을 몸을 위해 좋은 것을 잘 먹고 싶었지만, 기차 시간을 위해 결국 또 주변에 있는 슈퍼에 들어갔다.


편의점이 아니라 병원 안에 있는 매점 같은 슈퍼였는데, 직접 만든 빵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특이한 멘치카츠 샌드위치와 요구르트를 샀다. 기차에서 먹는데 이마저도 맛있다. 요구르트는 그냥 불가리아 요구르트인데 뭐가 이리 맛있는 거지? 멘치카츠도 사실 그냥 잡고기를 튀긴 것 뿐인데 맛있었다. 고기보다도 안에 있는 초록색 야채가 뭔지 모르겠는데 감칠맛이 났다. 키치죠지에 가서 먹을 멘치카츠가 기대된다.

이렇게 정신 없이 후지산 등반이 끝났고, 후지노미야를 떠난다.

등반 자체도 의미있지만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 따뜻했고, 등산을 하면서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오하이요 고자이마스~" "곤니치와~"를 하도 많이 해서 평생 할 인사를 다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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