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침이 밝았다. 오늘도 날씨가 좋다. 7시 반에 눈이 떠져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주변을 산책했는데 역시나 조용하고 깨끗하다. 일찍 가게 문을 닫는 다고 일찍 여는 것은 아닌가보다. 8시가 넘어도 거리는 조용했다.

호텔에 돌아와서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한국에서부터 꼭 가고 싶었던 테미야 동굴과 오타루 수족관에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꽤나 긴 거리이기 때문에 힘든 여정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제만큼 오르막이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호텔 근처에 있는 베이커리에 들어갔다. 외관은 유럽식인데 진열대에 있는 빵들은 일본식이었다. 치아바타 같은 담백한 빵을 기대한 우리는 실망했다. 처음 보는 '피로시키'라는 빵이 인기가 있다고 해서 사봤다. 만두도 아니고, 고로케도 아니고, 빵도 아닌 것이 오묘했다. 나중에 찾아봤더니 러시아의 대표적인 빵 (혹은 만두)이라고 한다. 나는 일본 오타루에서 러시아 빵을 먹은 것이다ㅎㅎ빵과 함께 먹으려고 편의점에서 드링킹요구르트를 샀다. 어디든 요구르트는 맛있다. 그렇게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본격적인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기온이나 습도가 높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기 좋았다. 그리고 포장된 도로가 이어졌기 때문에 정말 기분 좋게 달릴 수 있었다. 비록 한 번 넘어지기는 했지만, 중간중간 바다도 보고 터널도 통과하면서 기분 최고였다.

동굴벽화와 암각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테미야 동굴은 참 의미 있었다.
반전은 수족관이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갔는데, 시골마을의 수족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해양 생물들이 있었고 갖가지 쇼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디지털화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소개글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것도 볼거리였다.

그렇게 한참 돌아다니고 숙소로 돌와와서 잠깐 쉬었다. 꿀 같은 휴식 후에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여행의 마지막 밤인 것을 생각해서 꼬치구이와 사케를 마시기로 했다. 검색하고 골라서 간 곳은 'Smith's Grill' 이라는 작은 포장마차다. 그런데 주인 아저씨와 음식도 그렇고 손님들도 범상치 않았다. 심지어는 술까지 엄청났다. 진저고기 꼬치구이는 간이 완벽하게 들어서 맛있었고, 로컬 사케와 잘 어울렸다. 우리의 옆에 중년 부부가 앉으셨는데 한국에 여행을 와 본적이 있으신데다 영어를 잘 하셔서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분들이 시킨 철판 볶음 같은 메뉴가 궁금해서 나중에 그분들이 떠난 뒤 마스터에게 물어보자 '김치볶음'이었다고 한다. 재미있어서 우리도 시켜 먹어봤다.  평범한 베이컨김치볶음인데 뭔가 독특했다. 친구에 의하면 한국의 김치볶음은 보통 완숙 김치를 사용해서 요리하는데, 이곳의 김치는 미숙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렇게 꽤나 많은 양의 술과 안주를 먹으면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여행의 마지막 밤에는 술을 많이 마시고 쓰러지듯 잠드는 것이 관례가 되어버렸다. 아쉬움을 잊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그냥 잠들기에는 그 허전함과 섭섭함이 견딜 수 없이 크게 느껴진다. 여행에서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늘 따라다닌다. 어느 장소에 가도 어느 음식을 먹어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다. 그렇게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마지막 밤'은 왜 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건지. 아마 무사히 잘 끝마쳤다는 안도감도 있을테고 아쉬움도 있어서 그렇겠지. 여하튼 이런 복잡한 감정들을 누르고 잠들었다.
느긋하게 일어나서 삿포로역으로 갔다. 따뜻한 라떼를 하나 사서 오타루로 가는 10시 58분 JR기차를 탔다.
삿포로역에서 오타루에 가는 기차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쾌속 에어포트이고 하나는 일반 JR기차다. 오타루에서 공항으로 갈 때는 쾌속에어포트를 타야하니까 이번에는 일반 기차를 탔는데, 지하철처럼 마주보고 앉는 좌석이 아니라 두 좌석씩 함께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좋았다. 오타루로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맑은 하늘에 바다의 색이 같아서 푸르름이 세상을 다 덮어버린 듯 했다.

오타루역은 작았다. 그렇지만 관광객이 많고 잘 정비가 되어 있어서 쉽게 인포메이션 센터도 찾을 수 있고, 지도도 얻을 수 있었다.
사람마다 여행을 하는 방식이 다양한데, 나는 어디를 가든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지도를 꼭 챙긴다. 휴대폰 로밍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밖에서 구글맵은 이용할 수 없고 여행지에서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휴대폰으로 길을 찾으면 방향 표시까지 해주고 빠르고 정확하게 길을 찾게 해주지만, 나는 급할 것이 없는 여행자다. 시간이 많고 많아서 길을 못 찾으면 배가 고플 뿐이다. 또 지도에 숙소와 가고 싶은 장소에 동그라미를 치고 번호를 매기는 재미가 쏠쏠하기도 하다.

받은 지도를 꼼꼼히 살피다가 자전거 대여소를 발견했다. 함께 여행을 한 친구가 삿포로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싶어했었어서 오타루에서는 자전거 여행을 하기로 했다. 대여소는 예약한 호텔 근처에 있어서 쉽게 찾았다. 이틀 대여하는데 가격은 2900엔이었다. 처음에는 자전거가 좋은 것도 아니고 조금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이틀 동안 기분 좋게 잘 탔다. 햇빛이 뜨거워서 그냥 걸어다녔다면 쉽게 지쳤을 것이다. 

오타루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으로 '카이센동'을 추천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래서인 것도 있고 워낙 해산물 요리를 좋아하기도 해서 점심으로 카이센동을 먹으러 갔다. 아주 작은 가게였다. 너무 비좁아서 다른 손님들이 앉아 있으면 들어가기도 어렵고, 다 먹었다고 나오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동안 'すみません…' 'ごめんなさい…'를 몇 번이나 들었다. 다른 손님들은 일본 사람들 같았고 모두 조용조용 식사를 했다. 그러한 분위기와 식사 매너가 배려심을 느끼게 해주어서 참 좋았다.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 해가 저물고 호텔에 돌아오는 길에 타코야키 차를 발견했다. 정말 설레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우연하게 좋아하는 타코야키를 만나다니! 내가 다음 학기에 오사카로 교환학생을 가는 것이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타코야키다. 그 정도로 좋아한다. 인상이 좋은 아저씨에게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여시냐고 물어봤더니, 오후 3시부터 9시 반 까지 하신다고 했다. 신이 나서 일단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으로 라멘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맥주와 타코야키를 샀다. 네기시오 (파소금) 맛을 먹고 싶었지만 기본 맛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타코야키와 먹는 북해도 삿포로 맥주는 정말 맛있었다.

여행의 셋 째날 밤도 그렇게 저물었다.
오타루의 야경은 멋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도시의 야경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거리를 걸으며 감상하기에 충분한 광경이다.

낮에 자전거를 탈 때 힘들어서 잠깐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이렇게 밤에 산책을 하면서는 너무 좋았다. 하루에도 수백번 마음은 바뀐다. 어느 것이 정말 '나'라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모든 마음과 감정이 한 순간의 것이다. 그렇다고 허무해 할 필요는 없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바뀔 뿐이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달라지기 때문에 매 순간이 특별하다.
여행의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눈이 일찍 떠져서 새벽부터 혼자 산책을 했다. 식물원(보타닉 가든)에 가고 싶었지만 월요일은 휴일이어서 열지 않았다. 대신에 홋카이도구청사(아카렌카)를 보고 홋카이도 대학교를 걸었다. 첫 날부터 한 생각인데 삿포로의 공기는 참 맑다.

산책을 마친 뒤 아침을 사기 위해 샌드위치 가게 "Sandria"를 찾아 갔다. 관광객에게 유명한 곳은 아니고 지역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로컬 음식점이라 찾기 힘든 위치에 있었다. 소박하고 귀여운 느낌의 테이크 아웃 전문 가게다.
사실 여행자에게 유명한 음식점이 아니면 외국의 음식은 입맛에 맞기가 힘들다. 그래서 한국어가 들리고 남들 다 가보는 가게이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하기 보다는 유명한 곳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추천해주신 주민의 성의도 있고, 동네 샌드위치 가게인데 24시간 운영한다는 건 아마 인기가 있다는 증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들어갔다. 가게 안에 들어가면 친절하신 아주머니가 맞아 주신다. 내가 방문한 건 아침 8시 쯤이었는데 사람들이 꾸준히 왔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가 뭐냐고 묻자 "더블햄에그샌드위치"를 추천해주셨다. 고기 종류 중에는 뭐가 잘 팔리냐고 묻자 "돈카츠샌드위치"를 추천해주셨다. 그래서 그 두 가지를 사서 호텔에 돌아왔다.
더블햄에그샌드위치는 평범한 맛이었는데, 빵이 매우 부드러웠다. 돈카츠샌드위치는 신기하게 맛있었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맛이었다. 내가 이 곳 주민이라도 이 가격에 이 맛이면 자주 들를 가게라고 생각이 든다.

그렇게 재미있는 샌드위치 체험(?)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삿포로 TV 타워를 감상했다. 밤에 보는 것도 화려했지만, 아침에 맑은 하늘과 함께 보는 것이 더 좋았다.

점심 때에는 홋카이도 신궁에 다녀왔다.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숲길을 걷는 기분이 상쾌했다. 한낮에는 햇빛이 강한데 신궁으로 가는 길은 큰 나무가 많아서 더위를 느끼지 않았다. 종교적인 지식이 없어서 무언가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좋은 산책을 했다.

스스키노 골목에 돌아와서 점심으로 소바를 먹고, 후식으로 커스터드 크림 맛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소바가 내 입맛에 안 맞아서 우울해졌었는데 이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어서 다시 행복해졌다.
음식 하나로 기분이 우울과 행복을 넘나든다는 게 우습지만, 여행지에서 먹을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일상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순간을 의미있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리와 메뉴선택에 집착한다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활에 특별함을 부여하기 위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6월 26일
티웨이 항공을 타고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했다. 쾌속 에어포트 티켓을 구매하고 삿포로역으로 바로 왔다. 6시 정도 되었는데 여름이라 그런지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한국과는 달리 선선한 날씨에 놀랐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위해 번화가인 스스키노 거리로 향했다. 라멘 요코초에 가서 맛있는 라멘을 먹을 계획이었는데, 가는 길에 시계탑도 있고 TV타워도 볼 수 있었다. 스스키노 거리는 정말 화려했다. 특히 기린 이찌방과 삿뽀로, 아사히 일본의 3대 맥주 간판이 나란히 있는 것이 볼 만 했다.

라멘 요코초는 큰 사거리를 건너서 왼쪽으로 가면 나온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라멘 요코초에는 꽤나 실력 있어 보이는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골목에 들어가자마자 달콤한 냄새가 나서 설렜다. 그 달콤한 냄새는 버터콘 라멘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가게 안은 모두 비좁았다. 여러 가게 중 곰이 그려진 것이 귀여운 가게에 들어갔다.

배가 많이 고팠기 때문에 맥주와 교자를 시키고 버터콘 라멘 미소 맛을 주문했다. 먼저 나온 교자는 평범하지만 맛있었고, 맥주는 정말 부드러웠다.
그리고 나온 버터콘 라멘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맛...! 라멘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꿨다. 진짜 맛있다는 말과 행복하다는 말을 연발하게 만들었다. 삿포로에서는 꼭 버터콘 라멘을 먹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삿포로 클래식 맥주와 과자를 샀다. 과자를 고르는데 일본어를 잘 못해서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고른 맛은 김 맛 소금......실패였다...ㅎㅎ



여행에서의 하루는 신기하다. 같은 24시간인데 일상의 하루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날 설렘으로 잠 못이루고 아침 일찍 눈을 떠서 공항에 도착하면 신이 나서 짐이 무거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만의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이 생경함과 낯설음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기억났다. 어느샌가 여행이 '소비'와 함께 연상되고, 대학생이니까 혹은 남들이 다 하니까 하는 관광 여행이 많아져서 여행을 떠나는 나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었다. 쇼핑과 관광 목적의 여행, 보여주기 위한 여행, 휴양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 지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어떤 여행이 될 지도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여행을 한다. 시간으로부터 익숙함으로부터 그리고 지루함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그런 여행이 된 적은 없다. 여행을 떠날 때는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로워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행 경비에 구속되고 나의 무력함을 느끼면서 좌절한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는 과정에서 조금씩 쾌락을 느낀다. 세계와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이 끝나면 또 여행을 할 것이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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