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닛포리에 있는 와사비 게스트 하우스에서 눈을 뜬 두 번 째 날이다.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5시 반이었다. 며칠 째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 예전에 유럽여행 했을 때는 잘 잤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통 잠을 못 잔다. 등상 후유증으로 몸이 아픈 것도 있지만, 작은 소리에도 바로 깨버려서 계속 피곤함이 쌓인다. 아무래도 다음 여행부터는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못 잘 것 같다.

씻고 나와서 정리를 하고, 숙소를 옮길 채비를 하고 있는데 한 일본인이 말을 걸었다. 게스트하우스 조식 신청을 했냐고 물어서 아니라고 했더니 자신의 조식권을 주었다. 게스트 하우스의 조식권은 전 날에 사면 300엔이고 당일 구매하면 500엔이다. 편의점에만 가도 400~500엔은 쉽게 넘기기 때문에 300엔이면 상당히 괜찮은 가격이지만, 나는 아침을 잘 먹지 않기 때문에 신청하지 않았었다.
물론 공짜로 준다면 먹는다. 특히 오늘처럼 원치 않게 일찍 일어나서 시간이 많은 날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와이파이를 마음껏 사용하며 조식을 즐기게 되는 건 행운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돈을 주고 산 조식권을 나에게 주다니... 일단은 거절했다. 그랬더니 자신은 더 잘 생각인데, 나는 일찍 가는 것 같으니까 먹고 가라고 했다. 친절도 하셔라. 예의상 두어번 더 거절하고 감사하게 받았다^_^
그 뒤로 이야기를 좀 나누었는데 이 분은 도쿄의 가나자와에 살고 있는데 게스트 하우스 운영에 관심이 있어서 여기 저기 숙박을 하고 있는 중이셨다.

기껏해야 300엔 짜리 조식이니까 '빵과 토스트, 잘 나오면 스프가 있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상당히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토스트와 잼, 잘 지어진 밥과 카레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밥과 카레 쪽이다. 카레 냄비의 뚜껑을 열었더니 무려 가지 버섯 카레다! 야채 카레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나는 감격을 하며 접시에 담았다. 옆에 카레 보울이 있던 것을 못 보고 접시에 담아버려서 묽은 카레가 접시 한 가득 찬 것은 실수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거기에다 옆에는 요거트와 오트밀까지 있었다. 와... 카레와 요거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두 가지인데 어떻게 알고...(〃ω〃)

조식 시작 시간인 6시 반에 딱 맞춰 먹은 거라 사람도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밥먹기 최적의 조용한 환경까지 갖춰져서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다. 조식권을 주신 가나자와 출신의 30세 일본인 남성분 감사합니다.

2.
야마노테센을 타고 닛포리에서 신주쿠로 갔다. 이번 숙소는 쿠야쿠쇼마에 캡슐 호텔이다. 프론트에 짐을 맡기고 근처 카페를 검색했다. 처리할 일들이 몇 가지 있어서 오전을 카페에서 보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도쿄 여행을 하며 둘러본 카페를 분류해보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크게는 개인 카페와 체인점으로 나뉜다. 한국 같았으면 분위기 좋은 아무 카페나 갔겠지만, 일본은 충전(充電, チャージ )을 하면 안 되는 카페도 많고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없는 곳도 많기 때문에 아무데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체인점 카페를 가기로 하고 주변을 검색해봤다.

첫째, 스타바(スタバ, 스타벅스)는 충전도 되고 와이파이도 되지만 너무 사람이 많아서 탈락.
둘째,  도토루(ドトール)는 3층까지 있어서 좋아보였지만 와이파이도 안되고 충전도 할 수 없었다.
셋째, 산마루쿠 (サンマルク)는 초코 크루아상으로 유명한 곳인데 아침을 잘 먹어서 그건 별 관심이 없었다. 와이파이는 되었으나 충전이 불가능했다.
마지막이 타리즈(tully's coffee, タリーズ)였다. 여기도 안 되면 맥도날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도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 그를 위한 좌석도 있었다.

3. 타리즈에서 열심히 할 일을 처리하고 나니 1시였다. 배가 고파져서 점심으로 뭘 먹을까 생각하다가, 아침에 먹은 카레가 너무 맛있었어서 점심도 카레를 먹고 싶었다. 그래서 마침 인터넷도 되겠다 주변을 검색해봤더니 "curry up"이라는 가게가 나왔다. 사실 내가 정말 먹고 싶었던 카레는 카가와 테루유키가 어느 방송에서 추천했던 blake라는 카레 가게였지만, 일요일에는 영업을 안해서 포기했다.
Curry up은 내가 있는 신주쿠 산초메에서 신주쿠코엔(신주쿠공원)을 지나 센다가야 쪽으로 가야했다.
신주쿠코엔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언어의 정원>의 배경이다.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봤던 터라 꼭 들르고 싶었지만, 1시가 넘은 한낮에 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비가 오는 여름의 아침 7시나 8시 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초콜렛을 들고 찾아야 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 핑계를 댔지만 사실 배가 고파서 지나쳤다.
 
4.
Curry up은 센다가야에서 하라주쿠로 가는 길에 있었다. 메이지 신궁 부근이기도 하다. 이 근처는 편집숍도 많고 고가의 맨션이나 단독 주택이 많다. 언뜻 보기에도 부유해보이는 동네다. 일본에서, 그것도 도쿄에서 부유한 사람들이면 얼마나 부자일까, 땅 값은 얼마고 집세는 얼마일까, 자가일까 전세일까, 차는 아우디일까 BMW일까 벤츠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외국차? 이런 생각을 하다가 도저히 얼마일지 계산이 안 되길래 멈췄다.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의 어느 단편에서 '계산'을 언급했던 게 떠올랐다. 내 인생에 계산들은 1시간 7800원의 근로장학생 아르바이트 시급, 1학기 350만 원의 대학 등록금, 교환학생 1년을 위한 1000만 원, 코어사업 장학금으로 매달 지급되는 50만원, 한국에 돌아가서 구해야 할 원룸 보증금 500만원과 월세 50만원 등등. 수 많은 '계산'들이 머리 속을 지나갔다.

그러다 도착한 curry up. 900엔의 카레. 먹자. 먹고 살기 위한 계산이니까 일단은 먹자.

작은 가게였다. 서촌이나 성북동에 있을 법한 외국식의 작은 식당이다. 2시가 넘었는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주방에는 일본인 한 명과 인도나 그 쪽에서 왔을 것 같은 외국인이 카레를 만들고 있었다. 인도 카레 전문점이니까 인도인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주문은 やさいカレー&バタチキンカレー(야채카레와 버터치킨카레) 반반 S사이즈로 했다.
맛은 내가 아는 그 인도식 카레다. 확실히 루카레인 일본식 카레보다는 깔끔한 느낌이고 향신료가 강하다. 나의 학교 근처에 있는 유명한 인도식 카레 식당 베나레스, 오샬, 비나 셋 중에서는 비나에 가까운 인도 카레 맛이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와서 아침엔 일본식 카레, 점심은 인도 카레, 그러면 저녁은 편의점 레토르트 카레로 할까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하라주쿠로 걸었다.

5.
하라주쿠는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유명한 크레페 집들이 많은데, 크레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칼로리도 높아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쇼핑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아사쿠사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통과했다.

6.
일찍 숙소에 들어와서 누웠다. 캡슐 호텔은 생각보다 훠어얼씬 편안했다. 무엇보다 깔끔하고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어서 좋았다. 그리고 텔레비전도 볼 수 있었다!!

츠마부키 사토시를 본방송으로 보게 되다니!!!

오늘도 이렇게 가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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