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날,

무라카미 류의 자전적 소설 <69-식스티 나인>을 읽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내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소수의 예외적인 선생을 제외하고,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내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그들은 인간을 가축으로 개조하는 일을 질리지도 않게 열심히 수행하는 '지겨움'의 상징이었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오히려 옛날보다 더 심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선생이나 형사라는 권력의 앞잡이는 힘이 세다. 그들을 두들겨 패보아야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우리 쪽이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도 즐겁게 살야야지, 라는 결심을 하고 잠이 들었다.

변덕이 심한 편이지만 이번 결심은 꽤 오래 이어져서 다음 날 아침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어디론가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떠날까 고민하다가 이전에 계획은 다 세워 놓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가지 못했던 교토 이치죠지에 가기로 했다.


이전부터 교토 이치죠지에 있는 게이분샤(恵文社)라는 서점에 가고 싶었다. 본래 독립 서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인스타그램에서 본 이 작은 서점인데 간판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더 중요한 이유는 라멘이다. 이치죠지는 맛있는 라멘이 많은 골목으로 유명하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그대로 전차를 타고 출발했다.

아와지 역에서 한큐 교토 선으로 환승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툭 치며 아는 척 해왔다.

도쿄 여행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는 지인이었다.  비록 나의 차림새는 볼품 없었지만 부끄러움보다 반가운 마음이 컸다.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방송을 들으면서 도쿄의 오미야게라며 급하게 '도쿄 바나나'의 포장을 풀어 하나 건네 주었다.

나는 같은 기숙사에 사니까 저녁 때면 또 볼 수 있는데 지금 주겠다며 그렇게 급하게 포장을 푸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감사히 받았다.



아침도 안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차에 타서 허겁지겁 먹었다.

부드러운 빵에 달콤한 바나나 잼? 앙금? 여튼 속이 잘 어울어져서 정말 맛있었다.


특급 가와라마치 행을 탔기 때문에 35분 정도가 지나자 교토 가와라마치 역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이치죠지까지 1시간 반 정도를 걸을 예정이다.

버스를 이용하면 한 번에 편하게 가지만, 혼자 여행을 할 때는 왠만한 거리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게 여행 중에 내가 빨리 지쳐 버리는 원인이지만...

혼자 여행할 때는 시간도 많고 걸으면서 구경할 수 있는 것들도 많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걷는다.


가와라마치에서 이치죠지까지 가는 길은 크게 두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가모가와 강변을 따라 걷는 길과 헤이안 신궁을 지난 후로 걷는 골목길이다.




역시 나는 가모가와 강을 봐야 교토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

기온 거리나 게이샤의 모습도 교토를 대표하는 풍경이지만 나에게 교토는 가모가와 강을 따라 걸을 때 가장 실감이 난다.

날씨도 좋아서 강변을 따라 걷는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1시간을 넘게 걸으니 드디어 이치죠지 골목에 진입했다.

우선은 첫 번째 목적인 라멘야로 갔다.

이치죠지 골목에는 간사이에서 유명한 라멘집들이 모여 있다.

대표적인 곳들이다.


이 중에 '天天有'와 '高安'도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 중에 한 곳이지만,

내가 오늘 목표로 정한 곳은 '極鶏(곡케이)'라는 곳이다.

ドロドロ(질척질척, 걸쭉걸쭉)한 국물로 유명세를 탄 닭 육수 라멘 전문점이다.



11시 30분이 오픈 시간이고, 내가 곡케이에 도착한 게 11시 45분 쯤이었는데 이미 사람이 많아서 대기표를 받아야 했다.

1시 쯤에 다시 오라는 것이다. 인기가 많다고는 해도 이 정도일 줄이야.

순간적으로 '내가 이 정도를 기다려서 이 라멘을 먹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 다른 라멘 집을 갈까 고민했지만,

딱히 바쁜 것도 아니니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기다리는 동안 두 번째 목적인 근처의 게이분샤 서점에 가기로 했다.


바로 내 앞에 대기표를 받았던 젊은 일본인 남자 일행 4명도 뭐하면서 시간을 때울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재미있어서 나도 모르게 엿들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1시까지 한 시간 넘게 남았어' '뭐하지?' '배도 고파' '못참겠어' '다른 라멘야도 유명한데 많은데 가볼래?'

'그래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일단 하나 먹고, 여기에 또 먹으러 오면 되겠다'


나도 배는 고프지만, 나는 한 번에 한 끼밖에 못 먹는 위장을 가지고 있어서 조금 더 참고 일단 게이분샤 서점으로 향했다.



사진으로 간판만 봤기 때문에 작은 동네 서점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 외였다.

외부도, 내부도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그리고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이 가득 차있었다.

직원들이 직접 읽은 책만 서점에 진열한다는 규칙이 있는 곳인데,

이 넓은 곳에 이 많은 책들을 다 읽고 진열하려면 과로사하겠다는 개구진 생각도 들었다.

마침 새로운 스태프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한 때 서점 직원이 꿈이었던 나였기에 관심있게 봤지만 서점의 크기와 책의 양에 빠르게 단념했다.



드디어 약속한 한 시가 되었다.

혹시라도 늦으면 차례가 밀릴까봐 한 시에 딱 맞춰서 갔다.

이 때에도 사람이 많아서 지금 번호표를 받으면 2시 40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가게 앞에서도 더 기다려서 드디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내부의 사진은 규정 상 찍을 수 없었고, 메뉴판만 찍었다.

기본적인 라멘이 800엔 ~ 1000엔 정도 하는 데에 비해 모든 메뉴가 700엔으로 저렴했다.



나는 가장 기본인 鳥だく(토리다쿠)를 주문했다.

( 사실 주문은 가게 안에 들어오기 전에 한다. )

라멘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가게 안을 둘러 봤다.

작은 가게이지만 깔끔했다.

손님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계산을 할 때마다, 자리에 앉고 일어날 때마다

라멘야만의 파이팅 넘치는 분위기로 가게의 직원들은 '이랏샤이마세-'와 '오오키니-'를 크게 외쳤다.

손님이 많고 회전율이 빠른데도 불구하고 청결했고, 가게 안에서 부터는 더 기다리거나 하는 불편함이 없었다.

한쪽에는 곡케이 컵라면도 전시되어 있었다.


드디어 라멘이 나왔다...!



와! 이건 본 적이 없는 비주얼이야!!!

혼자서 감탄을 하면서 사진을 열심히 찍어댔다.

내 옆에 앉은 라멘 동호회에서 만난 것 같은 커플은 들어오기 전 같이 줄을 서 있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프로의 향기를 풍기더니,

라멘이 나오자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조용히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라멘 프로가 아니기에 일단 사진부터 찍었다.


그리고 면을 국물에 푹 담궈서 한 입 먹었다.

와... 진짜 절로 감탄이 나온다.

먹어 본 적이 없는 식감이다. 정말 진한 국물이다.

백숙 국물과 비슷할 정도의 깊은 닭 육수지만, 그보다 더 진하고 강렬하다.



한 입 먹고 그 도로도로함에 너무나 감탄해서 사진을 더 찍었다.

국물도 국물이지만 면이 국물과 너무 잘 어우러져서 계속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위에 올라간 파 고명도 입맛을 잡아주는 데에 한 몫했다.

보기에는 느끼해보이는데 오히려 먹을 수록 개운하다.

이런 마성의 라멘이 있다니!!!


내가 여태껏 먹었던 라멘 중에 가장 맛있었던 라멘은 삿포로 라멘 요코초의 '버터콘 미소 라멘'이었다.

그 라멘도 전형적인 라멘은 아니지만, 어쨌든 비교적 전형적인 라멘 중 가장 맛있었다.

그런데 이건 퓨전 신세대의 라멘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핫한 젊은이들의 라멘이다.

진짜 맛있다.  


아부라 소바나 츠케멘도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국물을 선호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는 게 아깝지 않은 맛이다.



라멘을 먹은 뒤에는 부른 배로 행복하게 걸어서 헤이안 진구(헤이안 신궁)에 갔다.


곧 신년이기도 하고,

며칠 뒤에 한국에 잠깐 가니까 그 때 가족에게 전해줄 오마모리(부적같은 것)를 살까해서 일부러 찾아 갔다.

막상 사려고 이것 저것 보고 있는데,

이왕 사는 거 신년에 소원 빌러 신사 갔을 때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안 사고 그냥 나왔다.


다시 가와라마치 역까지 걸어 오니 4시가 넘었다.

추운 날씨에 꽤 오래 걸었더니 완전히 지쳐버렸다.



오늘의 여행으로 내가 조금 더 즐거워졌다고 할 수 있을까?


꽤나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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