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누구나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오히려 어딘가에서는 표출되고 있다. 예를 들면, 트위터나 블로그 같은 곳에서 표출된다. 이 공간들은 한없이 개인적이면서도 공개적이다. 이런 인터넷 상의 공간에 글을 올리는 것은 특정 누군가에게 보내는 말이 아니라 다수에게 자신을 표출하는 곳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누군가에게 말하면 위험해지는 금기는 아니다. 알려지면 비난 받기 때문에 나만이 알고 지켜야 하는 비밀도 아니다. 오히려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이다. 어딘가에 말하고 싶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요컨대, 감추고는 싶지만 비밀은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익명성이 보장받는 곳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비슷해보이지만 다르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도 다르다. 익명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일상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 이유를 생각해보면 역시나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누군가에게 자기 개시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친구나 가족 등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런 유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이 든다. 그리고 그런 유대 관계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 대면하여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지만, 늘 소통이 부족하다. 늘 대화가 부족하다. 다시 말해, 고독하다. 이 고독감을 해소 하고 싶지만, 또 다른 인간을 통해 해소하는 것이 힘이 드는 것이다.



도시인들은 자신의 속내를 타인에게 드러내거나 나아가 타인이 자신의 속내를 나에게 털어놓는 것도 피하려고 합니다. 만나는 타인들 모두와 이처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면, 도시인들은 신경과민으로 쉽게 지쳐버리겠지요. 그런데 신경과민을 피하기 위한 이런 거리두기라는 도시인 특유의 삶의 태도가 바로 자유라는 감정의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타인에 대한 냉담한 거리두기가 삶의 양식이 되어 대도시에서 나와 타인은 서로의 삶에 거의 간섭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이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도시의 암묵적 윤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속내 감추기라는 도시인들의 냉담한 태도는, 다시 말해 이로부터 발생하는 자유로움의 감정은 사람들을 원치 않는 고독에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 냉담한 태도를 지속하다 보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주변에서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짐멜에 따르면 도시인의 자유 이면에는 이처럼 심각한 고독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대도시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유라는 달콤함과 고독이라는 씁쓸함을 동시에 가져다 준 셈이지요. 가끔 도시인들은 가족을 통해서 자신들의 고독을 치유하려고 합니다. 가족이야말로 현대인의 마지막 보금자리라고 강조하는 것을 지금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을 치유하려면 결국 자신의 자유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는 한 청년이 있습니다. 비인격적인 도시생활의 냉혹함에서 발생하는 고독감 때문에 그는 힘이 듭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따뜻하고 푸근한 가족의 이미지를 떠올려봅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기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깨져버립니다.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결혼은 해야지. 너는 왜 아직도 사귀는 사람이 없냐? 담배를 끊어야 여자들이 좋아할 거 아니야?” 어머니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밥을 먹는 아들에게 누차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아니면 어머니는 낮에 일어난 시시콜콜한 일들, 이웃과의 사소한 다툼에 대해 흥분하여 얘기하거나 아니면 아버지가 이유도 없이 자신을 퉁명스럽게 대했다고 울분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이처럼 가족 중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면, 우리는 곧 피로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다시 냉담함을 되찾고 자신의 방으로 말없이 숨어들어버리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신경과민을 어느 정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랜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내거나 아니면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집에 머물게 된 도시인들이 권태로움 혹은 가족 간의 지나친 사생활 침해로 불쾌감을 느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질식할 듯한 집에서 도망쳐 나올 것입니다. 그러고는 대도시의 중심부, 다시 말해 백화점, 영화관, 서점이 있는 곳,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도시의 군중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겠지요. 이 점에서 보면 도시인들에게 가족이란, 도시의 삶 속에 관념으로 존재하는 시골과도 같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과 마찬가지로 가족도 자신의 속내를 모두 드러내는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한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도시 생활과 가정 생활은 미묘한 긴장관계와 보완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짐멜을 분석하는 강신주에 따르면 자본 주의에 바탕을 둔 도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은 자유를 누리면서 한 편으로는 그로부터 생기는 고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블로그와 트위터 등 익명의 공간에 자기 개시를 하는 현대인의 행동의 원인이 그 고독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를 원하는 인간 본성 혹은 전 자본 주의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관성, 그리고 자기 개시의 본능이 우리를 인터넷 상에 소리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실제 생활 속의 누군가가 알고 "너 블로그 봤어~" 라던지 "너 트위터 계정 발견했다?" 등의 말을 걸어 온다면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 없다. 지인에게 나의 인터넷 상의 공간을 발견 당했다는 것은 외롭고 나약한 내 모습을 들켰다는 것이다. 동시에 '너에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나의 진짜 모습이 있다'라는 것도 들켰다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는 너무 비약적인 해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홍보하지 않은 계정을 누군가가 먼저 발견한다는 것은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맞은 해석이다. 비록 내가 부끄러울 만한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또 다시 숨을 장소를 찾아야 한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얼마 전 지인이 내 블로그를 봤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황했다. 곧 아무렇지 않아졌지만 내가 왜 당황한 건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어제 또 다른 지인과 대화를 하는 도중 그 사람이 흘려 가듯 '트위터'를 한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어떤 말을 하는 지 궁금해져서 계정을 물어봤지만, '자신은 서브 컬쳐를 좋아하고 그를 위한 계정' 이라며 나에게 공개하기를 꺼려했다.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계정은 아마 지금 나와 마주하는 이 사람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또 다른 면을 알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자유와 고독의 상호작용으로 태어난 계정일테니 침해해서는 안 된다.



결론은, 혹시 트위터나 블로그를 돌아다니 던 중 자신이 아는 사람이 쓴 글 같아도 '얔ㅋㅋㅋㅋ너냐 이거?' 이런 식으로 아는 척하지 말아주세요. 사람에 따라서는 부끄러울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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